ADVERTISEMENT

[me] 내용도 없이 알쏭달쏭 '하드 보일드 개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상황 설명도 없다. 줄거리도 없다. 개그맨들은 무대에 나오자마자 연신 두 손으로 이마를 쳐댈 뿐이다. 그럼에도 보는 사람은 웃겨 죽겠단다. KBS-2TV '개그 콘서트'의 한 코너 '골목대장 마빡이'는 '무작정 이마 때리기'라는 설정 하나만 가지고 대번에 관객을 휘어잡았다. 특히 분당 100회가 넘는 속도로 계속 이마를 때리며 힘들어 하는 개그맨 정종철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여줄 때 웃음소리는 더욱 높아진다.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우리 형'코너는 매일 맞고 오는 동생을 도와주려는 형(김주현)이 주인공이다. 차력과 무술을 섞어놓은 듯 온갖 현란한 발차기와 주먹질 동작을 선보이던 형은 끝내 제풀에 지쳐 "심장이 터질 것 같아"하며 주저앉는다. 객석에서 환호가 나오는 것도 이 대목이다. 이처럼 단순 동작을 반복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출연진의 모습에서 웃음을 이끌어 내는 이른바 '하드 보일드'개그가 최근 인기다. 유행어 남발이나 시사 풍자에서 벗어난 새로운 개그라는 시각이다. 이에 대해 보는 이들의 가학성 심리를 자극한다는 지적도 있다.

#"코미디의 진화, 하드 보일드 개그?"=정종철을 비롯해 김시덕.김대범.박준형 등 '골목대장 마빡이'에 차례로 등장하는 개그맨들은 이마를 계속 때리면서 "우리 개그는 개그가 없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정말 아무 내용이 없다. 그럼에도 시청자 게시판엔 '마빡이 최고'라는 의견이 줄을 잇는다. 방송 2회 만에 "마빡이 욕하지 말고 싫으면 보지 말라"는 매니어도 생겼다. 인터넷 검색 순위 1위로도 떠올랐다.

미사여구는 없애 버리고 바짝 졸여내듯 단순한 문장만 사용한 '하드 보일드' 문학처럼, 개그도 부연설명 쫙 빼고 앞뒤를 뭉턱뭉턱 잘라낸 '하드 보일드'포맷이 최근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개그 콘서트'의 김석현 PD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제 시청자들 머릿속에는 그동안 봐 온 코미디와 드라마가 축적돼 있습니다. 사건의 발단.전개에 대한 설명은 불필요해지고 '패러디'만 남았죠. 패러디 대상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빼고 결과물만 보여줘도 요즘 관객들은 웃고 이해합니다."

그중 '마빡이'는 '힘들다'는 전제만 남기고, 흐름이나 줄거리까지 없앤 극단적인 경우. 드라마 같은 상황 설명은 시청자들이 지루해 할 뿐이며 빠른 템포, 서너 개의 반복 에피소드로 승부해야 한다는 얘기다. '마데 홈쇼핑' 'Go Go 예술 속으로' '나몰라 패밀리' 등으로 문화와 사회를 비틀어 댔던 개그 프로그램들의 새로운 진화인 셈이다. "더 간결하고, 더 불친절하지만, 더 자주 웃기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앞뒤 전개를 너무 줄이다 보니 제작진도 "시청자의 20~30% 정도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털어놓는다. '개그 콘서트' 시청자 게시판은 "10년 만에 정말 웃겼다"(hshc1999)라는 찬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도대체 어디서 웃으라는 거냐"(michelee)는 비난이 공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웃는다?"=최근 오락 프로그램에는 출연자의 체력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장면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과장된 제스처로 이마를 때리는 '마빡이'와 가벽을 타고 올라가 2단 옆차기까지 선보이는 '우리 형'의 개그맨들은 보는 이마저 힘들게 만들지만 그들이 힘들어할수록 웃음이 커지는 것도 사실. "힘들어 못 하겠다" "이 코너 빨리 없애라고 해"라는 출연진의 애드립성 대사는 시청자들의 가학성 심리를 묘하게 자극한다.

MBC의 '황금어장'도 출연자에게 온갖 요구를 하며 괴롭히기는 마찬가지다. 가수 싸이, MC 강호동.정선희 등 톱스타를 불러놓고 '시청자 사연 재연'이라는 명목으로 무당.사이코 등의 흉내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지난달 25일 방영분에서는 두꺼운 털옷을 입고 학으로 분장한 탤런트 임채무가 자기 차례를 한 시간 넘게 기다리며 무더위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중계방송하듯 내보냈다.

SBS '웃찾사'의 '누나 누나'는 아예 한 발 더 나간다. 두 명의 출연자(김중오.오인택)가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며 드라마 '다모'의 한 장면의 패러디를 반복하면 잠자코 듣던 '누나(김용명)'는 들고 있던 신문 뭉치로 출연자 머리를 마구 때리며 "병원을 보내! 병원을!"이라고 호통치는 식이다.

이렇게 땀을 흘리고 괴로워하는 연예인을 보고 즐거워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문화연대 문화사회연구소 이동연 소장은 "치열한 경쟁사회의 탈출구로 이런 개그 프로를 보는 것 아니겠느냐"며 "때리고 싶은 상사가 있고, 친구가 있듯이 감춰진 증오심을 대리만족으로 해소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웃는 기저에는 한국 사회의 '폭력성'이 감춰져 있다는 지적이다.

무대와 스크린 위에서 화려한 삶을 영위하는 연예인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며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위안을 얻으려는 심리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마가 벌게지고 숨을 헐떡이면서도 계속 이마를 때려야 하는 '마빡이'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은 아닐까.

홍수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