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나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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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시나리오 초고만 봤을 때는 유정이 참 걱정스러웠어요. 집안에 돈 있어서 잘먹고 잘살아왔으면서도 혼자만 아픈 척, 티를 내잖아요. 언뜻 재수 없는 여자, 그냥 투덜이처럼 보이지 않을까 답답했죠."

그 걱정을 크게 덜어준 것은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었다. 촬영 전 3박4일간 합숙을 하면서 장면과 대사를 함께 다듬었다. 촬영기간만도 무려 5개월. 무엇보다도 배우의 감정을 중시하면서 시나리오 순서대로 테이크에 테이크를 거듭한 결과다. 이나영에게는 담배 한 모금을 빠는 디테일까지도 고민이 컸다. 유정이 회색빛 구치소를 처음 방문하면서 입는 옷 색깔을 보라색으로 바꾼 것도 그런 고민의 결과다.

"처음 준비된 옷은 무채색에 가까웠어요. 근데 유정이 그런 여자가 아니잖아요. 보라색을 고른 것은, 남보기에 미친 듯도 하고,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게 유정이니까." 그렇게 점점 가까워진 유정을 이나영은 이렇게 다시 말한다. "남의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것이, 실은 사람을 되게 좋아하는 거죠. 정말로 무관심하다면 아예 말을 안할 텐데. 그런데 남들에게 착하게 보이는 것을 스스로가 냉소적이라는 판단 때문에 용납하지 못하는 거죠. 누구보다도 이해받고 싶고, 이해하고 싶어하면서도."

원작에는 사형제도의 타당성을 묻는 묵직한 질문이 담겨 있다. "부담스럽기보다는 깨달음을 많이 얻었죠. 용서라는 것, 삶과 죽음, 인간이라는 존재…이런 본질적인 단어에 대해 많은 걸 느꼈고, 느낄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어요. 이래서 죽겠다, 저래서 죽겠다는 말을 쉽게 쓰는데, 그렇게 남발할 수 없는 말이잖아요. 촬영 전에 사형수분들과 만났어요. 영화 때문에 만나는 게 민폐 같았는데, 참 솔직하시더군요. 욕심을 버린 사람의 얼굴이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왜, 그러잖아요. 악할 때 선고를 받고, 선할 때 집행을 받는다고."

영화 초반부 지극히 냉소적이었던 유정의 감정은 윤수와 만남을 거듭하면서 점점 감정을 발산한다. 그 절정이 영화 막판 엄마의 병실에서 복받치는 울음을 참으며 속말을 쏟아내는 장면이다. "시나리오 읽을 때마다 울었던 대목이고, 참 중요한 장면이죠. 근데 촬영을 하다 보니까 제가 감정을 제대로 그리기 이전에 눈물부터 흘리는 거예요. 그때 감독님이 '유정아, 우리 눈물만 흘리지 말자'고 하셨어요. 배우로서 참 아픈 지적이죠. 새벽 5시까지 촬영하고도 오케이가 안 나서 잠깐 눈을 붙였는데, 정말 다시 촬영하러 가기가 싫었어요. 그런데 그 퉁퉁 부은 눈으로 촬영한 장면이 바로 오케이 컷이 됐죠. "

영화에는 두 남녀만으로 전달할 수 없는 감정을 윤여정.강신일.김지영 같은 중견배우들이 나눠 맡아 표현한다. "그냥 볼 때는 무난히 연기하시는구나 했는데, 모니터로 보고는 바로 앗, 하고 무릎을 꿇을 정도였죠."

작품마다 촬영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인물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는 이나영이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담담하다. "배우로서 만족해요. 많은 걸 깨달았고, 감독님이 '단 한 컷이라도 진심이 없으면 안 쓰겠다'고 했던 그 말에 충실했으니까. 이 영화의 장르가 휴먼드라마냐, 멜로냐, 이 감정이 사랑이냐, 어떤 사랑이냐 이런 걸 따지는 게 말장난 같아요. 그 감정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게 제일 중요한 거죠."

글=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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