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독재에 신명바친 큰 정치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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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해방이후 이 나라 정치사에 명멸했던 많은 인물 가운데 고·유석 조병옥박사 만큼 아쉽게 기억되는 정치인은 드물 것이다. 유석은 1960년2월15일 자유당의 그 악명 높았던 3·15부정선거를 한달 앞두고 미국 월터리트 육군병원에서 위암수술을 받다가 타계한 이 나라 정통야당 진영의 마지막 거목 정치인이었다. 유석은 그에 앞서 1959년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당시로는 이정권의 독재횡포를 저지할 민중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유석은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자 「죽나 사나 결판내자」는 구호를 외치며 전국을 돌다가 병마에 꺾이고 말았는데 당시의 대세로는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유석은 죽었고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감행했으며, 그로인해 4·19혁명이 일어났다.
유석을 아쉽게 추억하는 까닭은 그때 평화적정권교체의 기회가 무산되고, 그럼으로써 그후의 정치사가 유혈과 압제로 얼룩지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유석이 아쉬운 이유는 그의 인물됨에 있다. 그는 큰그릇이라는 점에서 아마 첫째가는 정치인일 것이다.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지만 유석이 해공 신익희와 손잡고 자유당에 맞서 민주당을 창당 (55년9월)했을 때 그는 민주당공천 대통령후보에 자신과 경합중이던 해공을 흔쾌히 추천한 일이 있다. 이유는 한가지 『내가 대통령이 되는 일보다 자유당독재를 무너뜨려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일이 더 크고 막중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당시 해공과 유석의 당내 세력은 백중세였다.
유석은 바로 그점 때문에 민주진영의 분열과 전력약화를 우려해 후보지명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리 해공에게 양보의사를 전달했고 끝까지 해공을 도와 분투했다.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못살겠다 갈아보자」의 민주당 바람은 그래서 더욱 열기가 높았던 것이다. 유석은 일제하에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 수학, 철학박사학위를 받아 연전의 교수직을 맡았었는데 신간회 창립회원으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미군정당시는 경무부장으로 반공일선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후 이정권때는 전시내무장관으로 대구사수를 고집해 끝내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는데 공헌했다. 그러나 유석은 이박사의 독재횡포에 직면하자 감연히 반독재의 기치를 들고 이 나라 정통민주세력의 최일선을 자임하고 나섰던 것이다.
『자유와 평화를 좋아하는 국민은 백색전체주의나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모두다 배격하고, 민주주의를 정치적 생활의 금과옥조로 삼아 이를 사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투쟁해야 한다.』
이것이 유석의 정치철학이었다. 그는 당시에 이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웠다. 신명만이 아니라 가진 것이라면 동전한닢이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쏟아 부었다.
그런 유석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번도 내몫을 고집하지도, 챙기지도 않았다. 대권후보를 양보했는가 하면 타계이후 집한칸 유산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큰 정치, 대승적 삶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실천해 보인 분이다.
유석의 정치인관은 오늘에도 큰 귀감으로 우리의 귓전을 때린다.
『공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생과 부와 귀에 애착하는 자로 더불어서 천하 일을 가위 의논할 수 없고 더군다나 국리민복을 위한다는 정치인으로서 이 세가지에 집착하는 자는 애당초 공인정치인 자격이 없다.』
내가 유석을 만나게 된 때는 50년 2대 총선때다.
그후로 타계할 때까지 줄곧 유석을 따르고 그의 뒷바라지를 했지만 그의 금도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유석은 몇차례의 투옥과 테러를 경험했으면서도 순박하고 인정이 넘치는 훈훈한 사람이었다. 촌부같이 무뚝뚝한 듯, 씨익 웃는 인상과 그의 주량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랜 지우를 만난 것처럼 마음 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갈데없는 야당의 대부였다.
그의 30주기를 맞아 유석을 회상하면 오늘날의 정계가 왠지 왜소하게 느껴진다. 대의 앞에 소아를 과감히 벗어 던지는 제2의 유석은 없는 것일까. 복잡한 속셈보다는 선 굵은 대승적 인물이 새삼 그리워진다.

<유석 30주기 추도식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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