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6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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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NYT “탁치가 통일에 도움”/「조선의 소연방화 희망」 기사로 박헌영 곤욕
강문석이 박헌영의 지시로 1월3일 서울운동장에 나갔다고 고백한것을 보면 박헌영이 1월2일에는 서울에 있었던것은 확실하다.
내가 박헌영을 만난것은 1월8일이었다.
왜 이날을 기억하고 있는가하면 이날 박헌영은 공산당중앙본부와 해방일보가 들어있는 정판사 빌딩 1층 정판사 사장실에서 미국기자들과 인터뷰를 했기 때문이다. 박헌영이 의자에 앉고 그의 양쪽에 선전부간부가 몇사람 서고 내가 박헌영의 바로 뒤에 선채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미국기자들은 4∼5명밖에 안되었고 모두 견장이 달리지 않은 군복같은것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아직 종군기자라서 그런줄 생각했다.
그들 가운데 여기자가 한사람 끼어있었다. 그들은 AP,UP,INS통신사(이 통신사는 뒤에 UP통신사와 합해 지금의 UPI통신사가 되었다.),그리고 뉴욕타임스의 기자들이었다. 미국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박헌영이 영어로 직접 대답했었다.
나는 그때까지 박헌영이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줄은 몰랐다. 인터뷰는 우호적인 분위기속에 원만히 끝났다.
그 전날짜의 뉴욕타임스는 조선의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대강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담결정은 조선에 우호적인 나라들의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었으나 5년간의 신탁통치는 현재 미국과 소련의 군정으로 분할되어있는 상태보다는 나을것이다.
탁치는 조선인에게 발전의 희망을 줄것이며 또 조선인이 오늘날의 혼란상태를 수습하면 탁치기간은 축소될수도 있을것이다. 탁치는 농업의 남조선과 공업의 북조선을 분할해 정치와 경제의 통일을 방해하는 장벽을 제거할것이다. 조선의 정치지도자들은 조선이 정치적으로 성년기에 들어갔다는것을 증명해야 할것이다.
조선을 사랑하는 세계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탁치의 운영 여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며 또 카이로에서 약속한 조선의 완전독립에 대해 전진하는 것을 희망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신탁통치의 수락이 조선의 통일과 발전에 도움이 될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충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후 뜻밖에 동아일보가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인용,박헌영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은 소련의 일국신탁통치를 받을것이며 장래에는 소련의 일개 연방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아마 호외까지 발행한것같은 기억이 있다. 그것은 서울의 빌딩과 골목길에 나붙어 마치 공산당이 나라를 소련에 팔아먹을 것 처럼 한바탕 반공 소동을 일으켰다.
박헌영의 인터뷰 현장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한 나로서는 정말 기가 차는 일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뉴욕타임스는 런던타임스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신문으로 믿고있었다. 나도 영어로 의사 소통은 할수있을 정도다.
박헌영과 미국기자들과의 인터뷰때에는 동아일보에 인용된 보도와 같은 질문이 나오지도 않았고 또 박헌영이 그러한 답변을 한일은 전혀 없었다.
생각해보면 알일 아닌가. 만일 박헌영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해도 그가 어린아이가 아니고 정치가인데 하필 미국기자들에게 그런 말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해서 이런 기사가 뉴욕타임스에 나오게 되었는지 지금도 나는 이해가 안된다.
기사내용인즉 모스크바 삼상회담 결정은 소련이 조선을 적화하기위해 미국과 영국이 반대함에도 억지로 통과시킨것이고 또 이것을 소련의 앞잡이인 조선공산당이 절대 지지하고 공산당의 괴수인 박헌영이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조선을 소련의 일개연방으로 만들겠다』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울장안과 국내는 벌집쑤셔 놓은듯 소란이 일고 살벌한 분위기로 치달았다.
드디어 진실을 추구하기위해 조선신문기자회가 들고 일어섰다. 조선신문기자회가 그날 박헌영과의 인터뷰에 참가한 미국기자들을 찾아다니며 증언을 듣기로 했다. 그런데 AP통신사 기자도,UP통신사 기자도,INS통신사 기자도 자기는 그런 말을들은 일이 없다고 증언했다. 그래도 증언만으로는 안되니 그것을 타이프로 쳐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AP와 UP기자는 자기의 동료기자가 관여한것인데 자기가 서면까지 작성해 사인한다면 그 친구의 체면을 손상시키게되니 그것만은 용서해달라고 하며 자리를 피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INS통신사 기자는 자기손으로 타이프를 쳐 사인까지 해주었다.
그것을 조선신문기자회실에서 각사 기자에게 보여주어 박헌영과 공산당은 그 문제로 더이상 공격당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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