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개혁과 부다페스트학파/진덕규(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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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구사회에서의 정치적 변혁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관심사중의 하나다. 스탈린주의자들의 폭압이 예사로 자행되었고 평등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을 경직된 획일화로 내몰았던 그 사회가 정치개혁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동구사회의 변혁을 전통적인 종교의 영향에 의해 설명하려는 사람도 있고,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이도 있다. 그런가하면 텔리비전과 같은 대중매체의 가시영역 확장이 던져준 현상으로 인식하는 이도 있다. 그 어느 경우이건 지금의 동구사회에서는 분명히 거대한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전세계에 충격파를 던져주는 21세기의 지향으로 정초돼가고 있다.
○마르크시즘의 새 해석
모든 사회변혁이 그렇듯이 동구사회의 변혁에도 그 밑바탕에는 하나의 거대한 지성사의 흐름으로서의 사상운동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러한 사상운동의 모태가 바로 부다페스트학파다. 오늘의 동구사회 변혁이 스탈린주의를 극복하려 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사회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고,공유개념의 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시장경제제도를 부분적으로 도입하려는 모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다페스트학파에서 그 단서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부다페스트학파는 주로 지외르지 루카치의 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아그네스 헬라,지외르지 마크스,미하리 바즈다 등이 들어있다.
이 학파의 중요한 사상적 특징은 다음 몇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개별사회의 현실성에 입각해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궁극적 승리를 예언했던 마르크스의 단정적 주장에서 벗어나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다층 계급구조를 인정하면서 노동자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의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둘째,이들은 스탈린주의 국가체제의 비민주성을 공격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 민중체제를 수립하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스탈린체제야말로 가장 반민중적 통치구조라고 반격하고 있다. 셋째,재산의 공유화는 인간의 개별적 가능성을 말살하고 하향적 평균인을 양산함으로써 민중의 기본적 경제욕구조차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정통 사회주의에 대한 부다페스트학파의 이러한 비판은 마르크스주의의 보편론을 배격하고 사회주의의 민족주의화를 지향하는 개별성을 보여주었으며 스탈린체제의 경직성을 극복하고 다원적 복수정당제도를 주장하게 되었고 공유개념 위주의 단일적 경제구조에서 벗어나 계획과 시장경제를 혼합시키려는 지향성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사회주의의 민족주의화,다원적 복수정당제도,시장경제의 수용을 지향하려는 부다페스트학파의 사상운동이 정치적으로는 급진민주주의로 귀착되었는데 그것은 부르좌 민주주의를 수용하려는 시도라기 보다는 사회주의의 인간화를 실현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이 세상을 인간해방의 고향으로 만드는 것』이 정치의 최대과제라고 주장했던 아그네스 헬라의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주된 이념 「인간해방」
부다페스트학파의 사상운동이 동구사회를 변혁시키는 이념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학파의 지성사적 전개과정에 관심을 모으게 된다. 부다페스트학파의 사상운동은 주로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단계는 1차대전을 전후한 시기인데 이때 루카치를 중심으로 만하임ㆍ코르쉬ㆍ아놀드 하우저 등은 일요회를 조직하여 동구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함께 논의하게 되었다. 이들은 민중의 이중적 약탈현상,즉 봉건적 지주로부터의 약탈과 제국주의자의 유린을 차단하기 위한 지식청년들의 정신적 울분을 이론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이 시기는 부다페스트학파의 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기간이었으며,이론과 실천의 합일적 가능성을 마르크스와 헤겔의 접합에서 모색했던 시기였다. 둘째 단계는 1차대전이후부터 2차대전이 종결됐던 기간인데 부다페스트학파에는 가장 참기 힘든 시련기였다. 왜냐하면 동구 전역에 수립되었던 파쇼체제는 이들 부다페스트학파의 지식인들을 유대인 공산주의 음모가로 규정해 가혹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이들 대다수는 파시스트의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외로 망명했다.
그러나 지식인에게 국외 망명은 곧 정신적 유랑자로의 전락을 의미하며 활동공간의 상실을 뜻한다. 그들은 전쟁이 채 끝나지도 않은 와중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그처럼 열망했던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수립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시작된 부다페스트학파의 셋째 단계에서 그들은 사회주의의 모국으로 생각했던 러시아의 볼셰비키들로부터 반혁명적 개량주의자로 규탄받는 역설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하여 투옥되었으며 집단농장의 오지로 추방되기도 했다. 동지라고 믿었던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이념적 배신행위가 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부다페스트학파의 사상운동은 서서히 민중적 공감을 얻게 되었고 스탈린주의자의 독재에 맞서려는 변혁운동의 사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질곡으로 떨어진 민중에게 부다페스트학파의 이념은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서 안으로는 급진적 민주주의 제도화로 구축되었고,밖으로는 네오마르크스주의의 한 유파로 발전되었다.
○민중적 공감대 얻어
자기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이념의 설정과 그것에 의한 사상운동의 전개,그리고 민중적 수용의지의 확산에 의해 모색되는 사회변혁의 추구야말로 결코 좌초될 수 없는 전진의 이정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념의 설정 없이 전개되는 변혁은 한낱 혼돈의 외연이거나 또다른 과도기의 이행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해방은 평등의 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자유와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에서만 가능해진다』는 부다페스트학파의 주장이야말로 오늘의 동구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변혁의 깊이를 알려주는 한 지표가 된다고 할 수 있다.<이대교수ㆍ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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