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한천수 기자 사할린동포 모국방문 동승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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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4시간이면 오는데 50년 걸리다니… ”/KAL기 태극마크 보고 목메어/상봉직전 모친타계 소식에 통곡
특별전세기가 서울 상공에 진입했다는 기내방송이 나오자 백발이 희끗희끗한 귀향객들은 일제히 창가로 몸을 기울였다. 눈자위가 붉어지고 목이 메어져왔다.
그리고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쳤다.
『4시간도 채 안걸리는 곳에 고국과 핏줄을 두고 한숨 속에 살아온 지난50년이 원통하기만 합니다.』
누군가가 독백처럼 토해 놓았다.
일제의 징용으로 혹사당했던 한국인의 한이 남아있는 곳,4만여명의 한국인동포가 핏줄과 생이별한 채 고국땅을 그리워 하며 살아가는 곳,사할린­.
대한항공 특별기가 사할린의 주도 유즈노사할린스크에 도착한 8일낮 공항에서 열린 조촐한 환영식에서 통역을 맡은 사할린 동포3세 청년은 KAL기의 사할린 비행을 「사변」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큰 사건이라는 뜻이다.
사할린으로서는 국내선 공항에 첫 국제선 여객기가 한국에서 날아온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인적교류에 이은 경제교류에의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KAL기의 사할린 비행은 그곳 동포들에겐 너무도 진한 감동이었다.
『우리 비행기,우리 태극기가 공항에 모습을 보이는 순간 목이 메고 눈물이 앞을 가렸어요. 꿈은 아니겠지요.』
이날 영하15도의 차가운 날씨속에 사할린공항 울타리밖으로 새카맣게 몰려와 한없이 손을 흔들던 우리동포들은 함께 고국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쉬운 듯했다.
모국방문길에 오른 사할린 동포1세는 1930년말부터 1940년대초 일제에 의해 징용에 끌려갔다가 눌러앉은 경우가 대부분. 따라서 방문단 1백20명 모두가 구구절절 애절한 사연을 안고있다.
『아흔세살 되신 어머니가 고향에 살아계십니다. 벌써부터 만나고 헤어질 일이 걱정입니다.』
충남 서천이 고향인 양용길씨(73). 49년만의 고국방문과 모자상봉을 앞두고 며칠밤을 뜬눈에 눈물로 지새웠다는 양씨는 결국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말았다.
어머니가 지난2일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양씨는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9년전 부인이 죽은뒤 자식도 없이 홀몸으로 살고 있는 조한준씨(72)는 고국에 두고 떠났던 경기도 연천의 부인과 1남(52)ㆍ1녀(48) 소식을 알 수 있을지 기대에 부풀어있다.
방문단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은 이재선씨(82)는 『어서 고향 의성땅으로 달려가 조상 산소에 성묘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주도가 고향인 강신생씨(70ㆍ여)는 몸이 불편해서 함께 고국땅을 밟지못한 남편(68)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특별기의 이운모기장(55) 등 승무원들도 감회가 새로운듯 사할린의 하늘에 자주 눈길을 주었다.
『7년전 이곳 사할린의 하늘에서 007기가 격추당해 무고한 인명이 흔적없이 죽어간 곳입니다. 이제 그 하늘에 우리 비행기가 소련인 항법사까지 태우고 처음 날아왔으니 세상이 무척 변했지요.』
사할린에서 서울까지 4시간,50년을 한숨 속에 살아온 귀향객들에겐 이 고국이 너무 가깝고도 먼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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