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여급류에 자생력 미지수/40분만에 간판 뗀 「민정호」 앞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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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통성 시비­여소 설움 “영욕 9년16일”/전씨그룹 문제등 난제첩첩
집권 민주정의당이 창당 9년16일 만에 간판을 내렸다. 1일 소집된 임시전당대회가 통합신당으로 합당을 결의함으로써 사실상 해체된 것이다.
이제 「구」 민정당은 민주ㆍ공화당과의 합당으로 태어날 민주자유당가칭)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겠지만 어떤 형태로 얼마간 어떻게 존속할지는 미지수다.
민정당은 5공의 주도정당으로 80년대 정치의 중심부에 있었지만 내내 정통성 시비와 당내 권위주의 체제문제로 시달리고 비판받아왔다.
5공 주도세력들은 3김으로 대표되는 구정치세력을 정치풍토쇄신법으로 묶어놓고 5공의 제도정치에 순응하는 정치인들로 민정당과 그 들러리 민한당ㆍ국민당을 구성해 제도권정치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민정당의 이념을 「민족ㆍ민주ㆍ정의ㆍ복지ㆍ통일」로 내세우고 북한의 노동당과 대결하는 통일대비정당,혁신세력까지도 망라하는 국민정당을 표방했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의 강제적인 구획에도 불구하고 민정당은 5ㆍ17의 불법성이나 광주의 상처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민정당은 김영삼씨 단식사건과 민추협등 야당의 계속된 도전을 받았고 12대 선거에서 그들이 급조해낸 민한ㆍ국민당의 의제정당들이 해금된 야당인으로 구성된 신민당에 밀려 허물어지는 과정을 목격해야 했다.
12대에서부터 가열화되기 시작한 직선제 개헌요구는 「체육관대통령」을 만들어낸 민정당의 정통성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민정당은 또 권위주의적 1인집중체제를 극복해내지 못했다. 당초 신군부는 당의 역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대통령선거ㆍ국회의원선거를 치르면서 합법성을 포장하는 당의 역할이 인정되고 민정당은 5공정치의 중심역할을 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권위주의체제로 인해 당내민주화는 항상 공염불이었으며 정부의 강권정치에 대한 지원역할 때문에 학원안정법 파동 등을 겪기도 했다.
또 5공의 정경유착에 물들어 장영자사건으로 당직이 개편되기도 했으며 정내혁대표위원의 축재파동도 있었다.
정통성ㆍ부정 등으로 선거때마다 곤욕을 치르던 민정당은 4ㆍ26선거에서 패배,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집권당으로서 과반수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노태우대통령 후보가 6ㆍ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하고 야당의 분열 덕분에 13대 대통령선거에 소수득표로 당선,집권을 계속하게 됐지만 민정당으로서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절실한 필요를 지니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번 민정당 해체를 가져온 정계개편을 바로 민정당 핵심세력이 주도했고 5공청산과 동일한 맥락에서 추진돼온 것등은 이를 말해준다.
사실 창업주인 전전대통령을 백담사에 은둔시키고 5공의 중심세력인 정호용의원을 희생물로 사퇴시킨 것도 민정당의 변신을 위한 자기 허물벗기라고도 할 수 있다.
민정계라는등의 파벌로 남게 될 구민정당이 민자당내에서 과연 얼마만큼의 영역을 확보하고 90년대의 새로운 주도정당으로 변신할는지가 주목된다.
정계개편을 추진해온 측에서는 새로운 민자당을 「노태우당」으로 변모시키려 하고 있다.
노대통령의 후광이 얼마나 지속되고 한때 한솥식구였던 이들이 얼만큼 자생력을 기르고 결속하느냐가 바로 민정당이 민자당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느냐의 관건이 될 것이다.
동시에 개편과정에서 완전 소외된 전전대통령의 5공그룹을 어떻게 처리하는냐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대체적으로는 당분간 노대통령의 비호 아래 박태준대표위원을 보스로 하는 결속노력을 전개할 예정이나 민주ㆍ공화의 파벌과 뒤섞이는 새로우 계파정치 속에서의 자생력은 미지수다.
경제난국ㆍ국제여건의 변화 등을 내세우고 90년대의 주도를 꿈꾸지만 국민적 여론의 뒷받침을 얻어 이것을 과연 지속적인 정치사회의 개혁으로 이어갈 것인지가 민자당으로 바뀌는 민정당의 여전한 숙제다.〈김현일기자〉
◎민정당 9년 막 내리던 날/폭설등 핑계로 창당인사는 거의 불참/“범여결속 외친 게 언젠데” 볼멘소리도
○…80년대의 영욕을 상징하는 민정당이 1일 삼성동 한국종합전시관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40여분만에 막을 내렸다.
이날 대회장에는 「노태우총재와 함께 더 넓은 세계로 더 밝은 미래로」라는 대형현수막이 걸렸으나 노대통령은 참석치 않았고 무척 침통한 분위기.
이날 대회엔 권익현전대표위원등 창당 때부터 관여한 원외인사들은 거의 참석치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범여결속을 외치며 신임당직자들이 다니길래 정말인 줄로 속았다』며 정계개편에 불만을 표시.
제주도에 「휴양」하러 갔던 이춘구전총장은 지역구인 제천으로 돌아와 「폭설로 인한 교통두절」을 핑계로 아예 불참했고 5공파뿐 아니라 6공파 일부까지 점차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
한 원외위원장은 『우리야 창당 때부터 줄곧 박수만 쳐주는 박수부대 아니냐』고 자조하며 『이제 당을 해체하는 데도 박수치는 일 외에는 할 수가 없다』고 몹시 우울한 표정.
○…이날 대회는 윤길중고문이 임시의장을 맡았고,합당문제가 안건으로 상정되자 남재희중앙위의장이 『민주ㆍ공화당과 합쳐 새로운 범국민정당을 창당하고 그 절차ㆍ시기ㆍ방법 등 제반사항은 중집위에 위임하자』고 제안설명.
윤고문은 「창당당원」의 입장을 전제로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런 중요한 결정에 대해 사전에 당원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가 없었던 점 이해해달라』고 설득.
윤고문은 『이의가 없느냐』고 물어 즉시 만장일치 통과를 선언했고 이어 박태준대표가 총재치사를 대독.
○…노태우대통령은 이 치사에서 『지난 2년간 우리 사회에는 급속한 민주화와 함께 지난 시대 쌓여온 계층간ㆍ세대간ㆍ지역간의 갈등과 다양한 욕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됐다』고 지적하고 『지역으로 갈라진 4당체제는 이 모든 도전를 극복하는 데 무력할 뿐 아니라 오히려 국민의 분열과 갈등을 증폭해왔다』며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
대회 후 일부 대의원들은 박준병사무총장에게 『우리 지역에 다른 인사를 위원장으로 내정했다는 말이 도는데 위원장을 바꾸지 말아달라』고 요구하는등 어수선.
박총장은 권익현전대표,김영구의원 등 일부 불참가능 인사에 대해 1일 아침까지 전화로 참석해달라고 설득.〈김진국ㆍ노재현기자〉
□민정당 일지
▲80.11.28=15인 창당발기인회 구성
▲81. 1.15=창당대회 전두환총재 선출,대통령후보 지명
▲81. 2.25=12대 대통령선거
▲81. 3. 3=전두환대통령 취임
▲81. 3.25=11대 국회의원선거,민정 1백51명 당선(전국구 61명 포함)
▲82. 5.20=이철희ㆍ장영자사건으로 당직개편(창당사무총장 권정달씨 사퇴ㆍ권익현총장)
▲84. 6.26=정내혁대표 부동산축재파동 당직개편,대표위원 권익현
▲85. 2.12=12대 국회의원선거,민정 1백48명 당선(전국구 61명 포함)
▲85. 2.23=당직개편(대표위원 노태우)
▲85. 3. 6=전면해금
▲85. 8. 1=학원안정법파동 당직개편(이한동총장ㆍ이종찬총무퇴진,사무총장 정순덕ㆍ총무 이세기)
▲87. 4.13=전대통령 「개헌논의 유보」 담화
▲87. 6.10=제4차 전당대회 노태우대표 대통령후보로 지명
▲87. 6.29=노후보 6ㆍ29선언
▲87. 7.10=전대통령 총재사퇴
▲87. 8. 5=노후보 총재로 선출
▲87.10.27=직선제 개헌,국민투표
▲87.12.16=13대 대통령선거,노후보 당선
▲88. 2.25=노대통령 취임
▲88. 4.26=13대 국회의원선거,민정당 패배. 민정 1백29명 당선(전국구 38명 포함)으로 원내과반수 미달
▲88.11.23=전전대통령 백담사 은둔
▲89.12.15=1노3김,연내 5공청산합의
▲89.12.29=정호용씨 의원직사퇴,박준규대표 정계개편 발언파문으로 사퇴
▲89.12.31=전두환씨 증언
▲90. 1. 5=당직개편,박태준대표ㆍ박준병총장ㆍ정동성총무
▲90. 1.22=3당 합당선언
▲90. 2. 1=임시전당대회,합당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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