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열기의 현장을 가다-|「인플레 공화국」 폴란드|"밤새 몇배나 올랐습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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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지난해 10월 하순 바르샤바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면서 인플레공화국 폴란드를 실감할 수 있었다. 미터기 옆에 붙은 「계기에 나타난 요금보다 40배 지불하시오」란 안내문을 보곤 혹시 바가지요금이 아닌가 조마조마 했다.
호텔 앞에서 『석달전만 해도, 12배밖에 안됐는데 그동안 인플레가 심해서…』란 택시운전사의 말에 3달러를 요금으로 지불하며 공연히 의심했던 것이 쑥스럽기까지 했다.
지난해 폴란드의 인플레는 월평균 35%, 한햇동안 자그마치 9백%를 기록했다.
평균으로 쳐서 그렇지 폴란드 물가는 슬금슬금 꾸준히 오르는 것이 아니라 자고 나면 밤새 5∼6배씩 오르는게 예사다. 올해도 해를 넘기자 마자 또 한차례 물가가 껑충 뛰었다.
추운 겨울 탓으로 연료비를 필두로 해 휘발유 값은 1ℓ에 1천2백즐로티 하던 것이 2천4백즐로티로 2배가 됐다.
전기료는 3배, 석탄값은 적게는 4배, 많이는 6배까지 뛰었다.
이날 오른 물가는 육류는 4천7백즐로티로 1·5배, 달걀 값이 1개 6백50즐로티로 2배, 햄 1㎏이 1만9천4백즐로티에서 3만즐로티로 올랐다.
정부가 시장경제기능을 도입하면서 지난해 8월1일 식료품가격을 자유화,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월요일 이 겁난다>
당시 월요일마다 오르는 통에 상점에는 값이 오르기 전에 물건을 사기 위해 시민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8월1일의 경우 하루만에 빵등 식품 값은 3∼4배, 육류는 7배, 우유는 20배가 됐다.
그래서 『폴란드 국민들은 월요일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얘기가 있다. 해가 바뀌며 물가가 오른 올해 1월1일도 월요일이었다.
지난 3일 바르샤바에서 자동차에 연료를 주입한 한 여성의 예를 들어 서방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한달 수입 9만5천즐로티의 M이라는 여성은 2만4천즐로티를 내고 10ℓ를 넣고는 허탈하게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이 여성은 한달 수입의 4분의1을 며칠간의 연료비로 써버린 것이다.』
이 여성의 경우 월평균 임금의 절반밖에 벌지 않는 시간제 근무를 하지만 어쨌든 한달 수입이 달걀로 치자면 1백50개로 환산 될수 있다.
취재진이 바르샤바에 도착했던 지난해 10월 중순, 치즈㎏에 3천5백즐로티, 빵 한덩이는 5백60즐로티, 돼지고기 1㎏은 1만2천9백즐로티였다.
이 마저 육류가게 문을 열자마자 매진돼 오후에는 고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국영상점의 경우다. 개인상점에 가보면 줄을 서기는 마찬가지지만 물건은 풍성하다. 국영상점보다 물건값이 2∼3배 비싼 것이 흠이지만 여기서도 돈만 있으면 모든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 있는 통로는 얼마든지 있다.
서방여행객에게 돼지고기 l㎏값이라야 달러로 환산하면 1달러가 약간 넘는 액수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싸게 생각된다. 그러나 폴란드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달 봉급의 20분의1이나 되는 거금이다.

<환율은 4가지나>
그래도 폴란드사람들은 물건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러한 추세는 폴란드 통계청이 발표한 89년 상반기의 공업생산이 전년비 4·3%감소에 유통부문 8%증가라는 데서도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조적으로 인플레가 심화되지 않을 수 없는 악순환의 되풀이다.
더욱이 정부가 지금까지 식료품을 비롯, 생활필수품에 보조금을 지급, 생산가의 20%에 미치지 않는 싼값으로 책정, 시중에 판매토록 했으나 시장경제도입을 이유로 가격을 시장에 맡겨 「정상화」하고 정부보조를 줄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월요일의 경악」에 못지 않게 폴란드를 찾은 외국인들이 놀라는 것은 이처럼 「비싼」가격에도 불구하고 물건이 나오면 금방 매진되는 것이었다.
이를 가리켜 바르샤바에서 만난 한 청년은 『폴란드인들은 수입면에서는 가난하지만 현금 보유에서는 부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청년은 또 『정부, 또는 나라는 가난해도 폴란드 국민 개개인은 부자』라는 역설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외국인들의 놀라움은 또 다른 데서도 발견된다.
인구 3천8백만명의 폴란드에 자동차보유대수 4백50만대인 것과 컬러TV가 잘 팔리는 것이다.
지난해말 폴스키 피아트 1대 가격이 2천만즐로티로 평균 수입 8년치를 모은 액수이고 보통 컬러TV 1대 가격이 2백만줄로티로 8개월 봉급 수준이다.
이를 가리켜 외국인들은 「폴란드인의 미스터리」라고 부른다.
이같은 경이는 폴란드 전국에 산재한 외화환전소에서 설명이 된다.
바르샤바 시내 곳곳에는 「칸토르-발누트」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어 이곳에서 외화를 자유로이 시민들이 사고 팔수 있다.
이 환전소는 지난해초 야루젤스키정부가 당시까지 달러암시장으로 폴란드지하경제를 주름잡던 암시장을 양성화하기 위해 길거리마다 개인영업으로 환전소가 문을 연 것이다.
폴란드에는 세가지 환율이 있다. 지난 연말 미화1달러에 2천2백50즐로티하는 정부공식 환율과 1달러에 7천5백즐로티하는 은행 프리미엄환율, 1달러에 8천즐로티하는 외환환전소환율이 그것이다.
여기에 계속 사라지지 않고 있는 비공인 암달러 시세까지 하면 사실상 환율은 네 가지인 셈이다.
플란드정부는 개인환전영업허가를 통해 폴란드인 개개인이 갖고 있는 개인소유달러를 시장에 유통시킴으로써 숨어있는 외화를 양지로 끌어내고자 했다.
폴란드에는 국민 개인이 갖고 있는 외화는 36억달러 수준에 달할 것이라는 것이 바르샤바 시민들의 말이었다.
그래선지 폴란드인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 환전소를 들락거리며 시세표를 들여다 보는게 일상의 일처럼 돼 있었다. 자기네 돈으로 살수 없는 생활필수품이나 기호품을 외화만 갖고 있으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날 그날의 시세가 절실한 문제였다.
외국인들은 폴란드인 개인의 외화환전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제를 이른바 「그레이 (Gray) 마킷」이라고 부른다.
암달러 시장이 블랙(Black) 마킷으로 「검은시장」이면 정상적인 「흰색시장」과 가운데인 개인환전소경제는 중간색인 그레이 즉 「회색시장」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폴란드의 「회색시장」은 크게 두가지로 형성된다.
미국등 해외에 나가있는 폴란드인들이 가족에게 송금하는 달러와, 폴란드인이 서독등 서유럽에 나가 일하고 번 돈을 갖고 들어오는 달러가 있다.
이들 달러는 국민들이 금방 즐로티로 바꾸지 않고 개인들이 갖고 있다.
폴란드인들은 연간 9백% 이상을 넘는 인플레로 인해 즐로티를 갖고 있는 것은 「생계비 자살행위」라는 위기감에서 결코 필요한 물건을 사기전에는 갖고 있는 외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폴란드기자동맹회장 피욘트코프스키씨는 『폴란드인들은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역사의 고난에서 배웠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시련기라도 폴란드인들은 먹을 것을 어떻게 확보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치침공으로 발생했던 1939년 바르샤바봉기 시절 바르샤바가 완전히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끔찍했던 국난을 겪으면서 폴란드인들은 어떻게 빵을 구하는지 몸으로 배웠다고 말했다.
『상점은 비어있지만 물건을 구하는 여러 경로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굶주림은 없다』고 한 바르샤바대 질린스키교수의 말과 상통하는 얘기였다.
그래서 오늘날의 어려운 폴란드경제사정에도, 마조비에츠키정부의 내핍강요정책에도 계속 인내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현재외채 4백억불>
그들의 20만∼30만즐로티 하는 월 평균임금이 개인환전소에서 미국달러로 환전할 경우 30∼40달러, 즉 한국돈으로 2만∼2만5천원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계산은 자본주의 국가의 외국인에게는 불가사의하게만 비쳐졌다.
폴란드의 당면 과제는 이미 시동이 걸린 시장경제도입과 외자유치에 있다.
외자유치는 폴란드경제가 위기에서 활기를 되찾을 수 있는「주사약」같은 것으로 거의 모든 폴란드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정부지도자에서 젊은 지식인, 그리고 바르샤바 중심가 상점주인들도 『외국자본이 들어오면 현재보다는 잘살게 될것』이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폴란드의 현재 외채는 약4백억달러. 90년대엔 다시 35억달러정도가 더 도입될 전망이다.
이 경우 국민1인당 외채는 평균 1천1백달러로 국민 개개인 월평균소득의 40배∼50배가 되는 무거운 것이다.
폴란드정부는 그러나 생필품가격인상과 이로 인한 시장경제제도의 안정이 이루어지면 현재와 같은 심한 인플레는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연초 급작스런 물가인상 후 1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비교적 안정세를 보이고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정부측은 주장하고 있다.
바르샤바의 자유노조정부는 오는 4월까지 인플레가 매달 4∼5%에 그칠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폴란드 자유노조정부의 노동장관 야체크 쿠론은 최근 이렇게 말했다.
『밤이 더 깊어질 수록 새벽은 가까워 오는 법이다.』
그러나 아직 계속되고 있는 바르샤바의 깊은 밤이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글 김동수 부국장
진창욱 기자
사진 주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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