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중국·러시아 신뢰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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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달 유엔 안보리의 대북 결의안이 채택된 이후 전통적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를 공개 비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교도통신은 복수의 외교소식통을 인용, 김 위원장이 지난달 안보리의 대북 결의안이 채택되자 18~22일 재외공관장회의를 긴급 소집해 "중국과 러시아는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26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의 이런 공개적 비판은 북한이 국제적인 고립의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고 통신은 분석했다. 김 위원장은 회의에서 "모든 도전을 우리의 힘으로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면서 참석자들에게 유엔 결의가 나온 다음날인 지난달 16일 결의를 완전히 거부하면서 자위적 전쟁 억지력을 강화하겠다고 천명한 북한 외무성 성명서를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고 소식통들이 전했다.

김 위원장의 이 같은 조치는 지난달 15일 안보리가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과 관련이 있다. 결의안이 통과된 당일 평양의 북한 외무성은 우둥허(武東和) 중국대사를 꼭두새벽에 소환해 질타했고, 베이징 주재 북한 외교관들은 중국 외교부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을 정도였다.

북한과 중국.러시아 간의 껄끄러운 관계는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22일 중국 당국은 선양 주재 미 영사관에 들어온 탈북자 세 명의 미국행을 허용했다. 지난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G8회담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공동으로 세계 핵 테러리즘방지구상(GICNT)을 제안했다.

GICNT는 북한과 이란을 겨냥한 것인데, 중국은 곧바로 이를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중국과 러시아 모두 핵을 무기로 하는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을 더는 용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는가 하면 중국은 미국통인 류샤오밍(劉曉明.50) 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부주임을 새 평양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한반도 문제를 담당한 경험이 없는 비교적 젊은 외교관이 평양 주재 대사로 파견되는 것을 놓고 외교가에서는 일찌감치 '북-중 혈맹' 관계의 변화를 점치고 있다. 앞으로 북한도 미.중 관계, 더 나아가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다루겠다는 뜻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같은 북.중 관계의 변화는 중국 지도부 안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지난주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주재한 중앙 외사공작회의에서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북한에 대한 반발이 제기됐으며, 전통적인 대북 관계를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라 제기됐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21일부터 사흘간 열린 중앙 외사공작회의는 중국 외교의 핵심 방향을 결정 짓는 회의다.

이번 회의에서는 ▶탈북자 증가에 대한 우려▶안보상 경계▶국제사회에 대한 외교카드 보전 등을 고려해 최종적으로는 북한 김정일 체제를 계속 지지한다는 방침을 확인했다. 그러나 또 다른 소식통들은 "우호관계를 원칙적으로 내걸고 있으나 이번 회의에서는 앞으로 개별 사안마다 적절히 대응을 달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중국이 적어도 지역 안보 문제에서는 앞으로 북한과 일정한 거리를 둘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교도통신은 "중국과 북한의 냉랭한 관계가 한층 선명해지고 있다. 일련의 움직임들이 중국의 대북 영향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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