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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54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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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사촌이 「학병동맹」주도,최린등 친일파 죄상폭로/좌익으로 몰려 경찰에 피살
45년 10월이었다. 뜻밖에 학병에 끌려갔던 사촌동생 진동이 해방일보로 찾아왔다. 그는 학병에 끌려나가 간부후보생이 되어 육군주계 소위로 대판사단에서 경리일을 보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곧 병영에서 나와 8월말께 서울로 와 학병동맹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와 그는 같은 서울에 있으면서도 그때까지 서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해방일보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당시 학병동맹이 조직됐고 위원장은 부산제2상업학교와 동경제1고등학교를 나와 동경제국대학에 다니던 왕익권이 맡고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사촌동생 진동이 거기에 참가하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그는 처음에는 군사국장을 하다가 지금은 부위원장도 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진주중때부터 신체도 건장했고 군사교련을 잘했었다. 그때 진주중학교에서 진동이와 동창생으로 군사교련에 뛰어난 학생이 셋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박진경(48년 제주도 토벌군 연대장으로 갔다가 부하에게 암살당함)이고 또 한 사람은 백우주(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ㆍ육군대장)였다.
학업도중에 일본제국주의군대에 끌려나갔던 학생들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민주조국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 학병동맹에 모인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일본 천황을 위해 죽으라고 전장터로 내몬 최린ㆍ이광수ㆍ장덕수 등의 죄악을 폭로하는 한편 시인 임화,한민당 선전부장 함상훈 등을 초청,강연도 들으며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촌동생은 46년 1월19일 새벽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직접 지휘하는 경찰대에 습격당해 죽을때까지 학병동맹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일반적으로 당시 학병동맹을 좌익으로 보았으나 실제는 그들가운데 한사람도 공산당원은 없었다.
공산당에서는 일본군대에 복무해 반민족적 행위를 한 자는 그들의 본의가 어떻든 6개월이상의 훈정기간을 두었기 때문에 일본군 출신으로 입당이 허가된 것은 46년 2,3월께부터였다. 그당시 공산당에서는 당원이 아닌 사람은 좌익이라 하지않고 무소속이라 했다. 45년 말까지는 공산당에 입당하는데 심사가 아주 엄격했다.
때문에 공산당에 입당을 청원했다가 거절당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들중에는 뒤에 반대진영에 가서 출세해 유명인물이 된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어떤이는 후일 대학총장ㆍ정당대표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당시 나의 생활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부 해방일보일과 당사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숙소는 유명한 영화감독이었던 추민(뒤에 월북해 북한영화의 기초를 쌓음)이 조직한 「서울키노」의 혜화동 합숙소였다. 「키노」라는 말은 러시아어로 영화라는 말이다.
추민은 뒤에 영화동맹 위원장도 겸하고 있었다. 아침식사는 「서울키노」친구들과 자취로 하고 점심과 저녁은 정판사빌딩 지하실 식당에서 외식을 했다. 신문사에서는 오전중에는 외근이고 오후에는 내근인데 내근은 주로 모스크바와 평양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읽어 편집국 학습회에서 해설했다.
그리고 저녁식사후에는 1층 정판사 인쇄공장에 내려가 공장노동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강의해 12월까지 그들 전원을 공산당에 입당케 했다. 그런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잘못이었다. 노동자라고 다 순박하며 정직하고 혁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사람 한사람 다들 구체적으로 그사람들의 성격ㆍ환경ㆍ사생활을 검토해 단계적으로 입당시켜야 했는데 공산당기관지와 문서를 인쇄한다고 그들을 무조건 믿고 일괄적으로 입당시켰던 것이다. 정판사 인쇄소는 해방전에는 지카사와(근택)라는 일본사람이 경영하던 상당히 큰 인쇄공장이었다.
그것을 해방이 되자 공산주의자 박낙종이 접수해 공산당이 쓰게된 것이었다. 그러니 거기있던 노동자는 원래 우연히 모인 것이지 사상적으로 모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는 품행이 좋지못한 사람도 있고 손버릇이 좋지못한 사람도 있었다. 예를들면 김창선과 같은 사람도 있었다.
해방전에 근택인쇄소에서는 조선은행권의 지폐도 인쇄하고 있었다. 해방의 혼란시에 김창선은 지폐를 찍는 징크판(원판)을 한장 훔쳐 감추어 두었다가 팔아 먹었던 것이었다. 김창선이 판 이 징크판은 결국 이듬해인 46년 5월의 그 유명한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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