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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일제 농업' 사은 행사를 펼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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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농림부와 농촌진흥청이 30일부터 다음달 3일까지 수십억원을 들여 '한국 농업 근현대화 100년 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다고 한다. 일본이 100년 전인 1906년 '권업모범장'이란 기구를 설치해 한국 농업 근대화를 이뤄준 은혜에 감사하고 이를 기념하는 잔치다.

장소는 경기도 수원시 서둔동, 서호 저수지가의 농촌진흥청이다. 몇 년 전까지 서울대 농생대도 있던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정조가 개혁 시범도시로 화성을 건설한 후 1799년 '서둔'(수원 서쪽의 둔전)이란 국영 시범농장과 '서호'라는 수리시설(경기도 기념물 200호)을 설치해 다양한 농업 실험과 선진 영농을 시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제 통감부가 한국 농업을 침탈하고 이곳에 '권업모범장'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농진청의 전신이라고 하면서 기념행사를 벌인다는 것이다.

실학자들의 구상을 받아들인 정조가 서거 1년 전, 생애 마지막 정성을 기울인 개혁의 현장에는 당시의 비석이 그대로 서 있고 '서둔동'과 '서호'라는 현재의 지명에도 정조의 농업 개혁의 자취는 역력하다.

그러나 이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 정부 기관들이 벌이는 행사는 정조시대 이래 농업 개혁의 노력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권업모범장'으로부터 한국 농업의 근대화가 시작됐다고 하면서 그를 기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농진청과 서울대 농생대가 1999년에 '서둔'과 '서호' 설치 200주년을 기념해 '한국 농업 연구 200년 학술 대회'를 열고 한국 전통농업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렸던 일은 이제는 무효가 되는 셈이다.

일제는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면서 침탈을 시혜라고 하고, 예속을 발전이며 근대화라고 가르쳤다. 우리 역사를 왜곡 부정했던 식민사관은 모든 영역까지 철저하게 침투했다. 한국의 전통적 역량을 부인한 일제가 한국 농업의 근대화를 자신들의 업적인 양 선전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일제의 가르침에 따라 기득권을 누려 온 일부 지도층 인사들이 아직도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역사 흐름을 되돌려 놓곤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올바른 역사 인식'을 추구하는 흐름은 자주 좌절하곤 한다. 농림부와 농진청, 서울대 농생대가 한국 농업의 역사와 계승 방향을 놓고 벌이는 99년과 2006년의 상반된 기념식이야말로 단적인 사례다. '역사 바로 세우기'를 외치는 이면을 보면 실제로 우리들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때로는 저들이 시키는 대로 일제 침략을 기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정조 시대 국영농장이 권업모범장이 되고 뒤에 농촌진흥청이 들어선 과정은 경복궁을 밀어낸 총독부 건물이 중앙청이 된 과정과 유사하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정부가 조선총독부를 계승했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일제 침략에 대해 우리를 근대화시켜 준 은혜라고 하면서 그를 기리는 기념식을 벌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간단한 이치를 놓칠 만큼 우리 사회의 역사의식은 취약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제국주의 침략의 정당화라고 비판하면서 역사인식을 문제 삼은 것이 며칠 전 광복절 날이었다. 그로부터 2주일 후, 우리 정부가 전통시대 자주적 농업 개혁의 현장에서 그를 짓밟은 일제 침략의 은혜를 기리는 것이 우리 정부의 역사인식 수준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 정부가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지고 '역사 바로 세우기'에 좀 더 신중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유봉학 한신대 교수·국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