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주자들의 가을 준비 ⑥·끝 정동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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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열린우리당 정동영 전 의장의 시계는 17년 전으로 돌아가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 그는 취재 의욕이 왕성한 30대의 방송기자였다. 분열과 통합의 베를린 현장을 한 달 동안 누볐다. 2006년 7월 중순 정 전 의장은 다시 베를린으로 건너갔다. 그의 주머니에는 취재수첩이 들어 있다. 정치생활 10년 만의 첫 '비켜서기'이지만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탐구 중이다.

5.31 지방선거 참패 다음날 정 전 의장은 '현애철수장부아(縣崖撤手丈夫兒.낭떠러지에서 손을 놓는 것이 참된 대장부다)'라는 말을 남기고 의장직을 던졌다. 칩거 한 달여 만에 "내가 왜 정치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겠다"며 독일로 갔다.

그렇다면 지금은? 정 전 의장은 독일 체류 기간을 다음달 중순께로 한 달 더 연장했다. 노 대통령이 꺼낸 '외부선장론' 등 국내 정치 상황이 껄끄러워서일까. 그는 서울의 측근과 통화에서 "이곳에서 배울 게 너무 많다. 좀 더 배우겠다"고 답했다. 9월 귀국이냐, 아니면 미국 연수냐의 이후 행보에 대해서도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 중소기업에 대한 새로운 관심=독일에서 정 전 의장의 새 관심은 '중소기업의 힘'이다. 그는 최근 베를린 인근 소도시의 한 의료기구 제작 중소업체를 방문했다. 이 업체는 의수.의족.휠체어 시장에서 세계 수위권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정 전 의장은 "독일이 통일 이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오늘의 번영을 유지하는 배경엔 세계 시장을 석권한 5000개의 중소기업이 있었음을 알았다. 곳곳에서 기업가 정신이 빛나고 있었다"고 측근들에게 전했다. 그는 루마니아의 대우조선소, 슬로바키아의 기아자동차 공장도 찾았다. "우리 기업들이 세계 경쟁력을 가지고 있음을 체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기업 탐방을 계속할 예정이다.

독일의 통일과정 연구는 정 전 의장이 정성을 기울이는 또 하나의 주제다. 그는 70년대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동방 정책'을 설계했던 에곤 바르 전 장관을 만났다. 동독과 서독이 어떻게 교류하고 협력했는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가져간 책 '통일 독일을 말한다'라는 세 권짜리 책도 정독했다. 정 전 의장은 또 독일의 차기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 작센 주의 밀 브라이트 총리를 찾아가 만났다. 21세기 새로운 리더십이 주제였다. 그가 방문 교수로 적을 두고 있는 베를린자유대학 사회과학대 교수들과 통독을 주제로 토론도 했다.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의 책 '역사를 바꾼 리더십'도 읽었다고 한다. 그가 귀국해 내세울 리더십은 어떤 리더십일까.

◆ "호사하러 오지 않았다"=정 전 의장은 대학 인근의 독일 가정집을 빌렸다. 방 한 개에 조그만 부엌이 딸렸다. 그는 부인 민혜경씨하고만 있다. 출국 전 최소한의 수행 인원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참모들의 의견에 "호사를 누리려고 가는 게 아니다. 과거 특파원 경험을 한 적이 있어 충분히 견딜 수 있다"며 거절했다.

지하철과 기차.버스를 주로 이용한다고 한다. 점심은 대학교 안 카페테리아에서 패스트 푸드를 이용할 때가 많다.

이런 생활이 불편한 점이 많지만 좋은 점도 있다고 한다. 그는 10년 만에 부인과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을 첫손으로 꼽았다. 가끔 차를 빌려 손수 몰면서 드라이브를 하기도 하고 산책과 조깅도 즐긴다.

환경 때문인지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다시 집어들기도 한다고 전했다. 정 전 의장 부부가 베를린에 있는 동안 첫째 아들이 이달 초 군에 입대했다. "아비가 못난 정치인이라 군대 가는 아들 얼굴도 보지 못했다"며 우울해했다고 한 측근이 전했다.

◆ 정중동의 참모들= 정 전 의장은 애써 국내 정치상황에 대한 관심 쏟기를 피하고 있다고 한다. 생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인지 자신의 귀국 후 계획에 대해서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내 최대 계파로 평가받는 정 전 의장의 참모들은 정중동(靜中動)의 움직임으로 2007년 대선 게임을 준비 중이다. 의장 비서실장을 지낸 박명광 의원이 의원들과 교감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실무 선에선 이재경 나라비전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이 움직인다. 유근관(경제학) 서울대 교수 등 학계의 자문그룹도 여전하다. 이들은 정 전 의장의 새로운 화두를 기다리고 있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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