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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자면제 교민이 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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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내엔 안 알려졌지만 석 달 전 미국 상원에선 우리에게 씁쓸한 일이 하나 있었다. 폴란드만 비자 면제 대상국에 추가하는 이민법 수정안이 통과됐던 것이다. 그것도 만장일치로. 그동안 비자 면제를 숙원으로 삼고 열심히 뛰었던 한국과 다른 6개국을 제치고 폴란드만 그 대상이 됐다.

그런데 이유가 묘했다. '유럽연합 회원국 중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기여한 동맹국에 대해 잠정적으로 2년간 비자를 면제한다'는 것이었다. 이민법 수정안 처리 후 제안자인 릭 샌토럼 상원의원은 이런 연설을 했다. "테러와의 전쟁을 돕는 충실한 동맹국이라면 당연히 비자 면제 대상국에 포함해야 한다". 그는 이어 "동맹국 국민이라면 관료적인 대사관 결정 없이도 미국 친지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마음대로 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맹방으로 치켜세워진 폴란드의 현재 이라크 파병 규모는 900명. 당초 1500명이었는데 이렇게 줄었다. 이에 비해 한국군은 3200명이 주둔 중이다. 미국.영국에 이어 셋째로 많다. 게다가 폴란드는 올 연말까지 전원 철수할 예정이다. 수정안을 공동 발의한 바버라 미쿨스키 의원은 "이라크전으로 폴란드 병사 17명이 죽고 20명이 다쳤다"며 혈맹을 강조했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전사자는 5000여 명이다. 2004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전당대회 연설에서 거명되지 않은 유일한 파병국이 한국이었다.

어이없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은 한국이 비자 면제국이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로 비자 거부율이 3.2%라는 점을 든다. 기준인 3% 이하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폴란드의 비자 거부율은 무려 26%에 달했다.

물론 폴란드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굳건히 뿌리내려 커다란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이 외교력 부족으로 제 밥그릇을 못 찾아 먹는다는 불쾌함은 지울 길 없다.

비자 면제를 막는 희한한 요소도 있다. 한국 교민 사회의 반대다. 한인단체들에 따르면 많은 교포가 비자 면제를 강하게 반대한다고 한다. 한 관계자가 들려준 경험담은 이랬다. 비자 면제에 호의적인 뉴욕주 피터 킹 하원의원에게 연락했더니 보좌관이 예상치 못한 얘기를 하더란다. "비자 면제를 해주면 큰일 나니 절대 해주지 말라고 전화하거나 편지를 보내 오는 한인이 많다"고 말이다. 이러니 미국 정치인이 열심히 뛸 리 만무하다.

교포들의 반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비자를 없애면 불법체류자들이 크게 늘 것이라는 우려다. 특히 향락업소 관련자가 쏟아져 들어와 교민사회를 흐려 놓을 것이라는 불안이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얘기다. 한국인 불법체류자와 윤락조직이 적발됐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올 1월 미 의회 보고서는 "관광 수입 증가를 위해 한국을 비자 면제국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면서도 "한국은 불법체류자와 윤락녀 입국 방지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비자 면제를 관철하려면 정부 차원의 윤락녀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다. 정부는 교민 사회의 반대자들도 이해시켜야 한다. 광화문 미국 대사관에서 몇 시간씩 뙤약볕 아래 서서 비자를 받아 본 사람들은 절감한다. 왜 비자 면제가 필요한지를. 비자 면제 없인 냉소적인 교민들의 피붙이들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더불어 비자가 없어지면 교민사회에 득이 됨을 알려야 한다. 여행객이 많아지면 식당이나 택시, 관광 안내 등을 통해 교민사회에 더 많은 돈이 돌게 된다. 정부가 미국 비자 면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남정호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