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에 책임일부 통감”/전씨 국회증언 지상중계/광주특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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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근원적으로 치유못한 점 반성/12ㆍ12 이전에 정승화 장군 체포하려 했다
▲10ㆍ26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으로부터 12ㆍ12사태=79년 국내정국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반발로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어수선하고 경제도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박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18년간이나 지속되어 온 절대권력이 일시에 무너져 국가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건 직후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10월27일 오전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예상되는 북한의 군사적 책동에 대비하여 전군이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게 되었다.
또한 비상계엄선포와 동시에 계엄지역 내에서의 수사 업무를 일원화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구 계엄법 제11조와 비상계엄업무의 구체적인 시행 지침인 「육군계엄시행계획」과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계엄사령관 직속하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설치,운용하게 되었다.
당시 합수부가 설치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79년 3월 국군 보안사령관이 된 뒤 을지연습을 실시해본 결과 전쟁 발발시의 보안 사령부의 역할 및 임무수행과 관련,여러가지 미비점이 발견되어 보완책의 강구를 각급 참모에게 지시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전시 전국계엄상황하에서는 정부의 모든 조직이 실제상 군의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는 바,이러한 상황을 가정하여 각급정보 수사기관을 조정 통제해야 할 비상계획수립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상계획의 일부로서 합수부 안이 평소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10ㆍ26사건 직후 실시된 계엄은 지역계엄이었으므로 정부조직은 군의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고 주요 간부들도 조사를 받게 되어 중앙정보부의 기능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인이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준비했던 합수부계획이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계엄사령관을 경유하여 국방장관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합동수사본부는 기존의 수사기관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기구로 구성한 것이 아니고 당시 군과 검찰,그리고 경찰로 나뉘어져 있던 수사업무를 조정ㆍ통제하여 계엄하에서 수사기능과 활동의 효율적인 운영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전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김재규의 체포경위와 12ㆍ12사태의 전말=대통령시해사건발생직후 국방부에 국무위원 및 군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며 사건현장을 목격한 김계원씨가 먼저 노재현국방장관과 정승화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노 국방장관은 곧 저를 불러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며 정승화총장을 만나 세부사항에 대한 지침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정 총장실에 가보니 정승화총장은 본인에게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에 보호하라』는 지시를 했다. 나는 당시 헌병감 김진기장군과 협의하여 김 장군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국방장관실로부터 참모총장실로 유인해 나오도록 하여 그곳에서 보안사 수사관을 시켜 김재규를 체포토록 하여 보안사 안가로 이송,보호 조치케 했다. 그때가 바로 10월26일 24시쯤이다. 얼마후 안가의 수사관들로부터 김재규가 틀림없는 범인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렇다면 안가에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김재규를 보안사 수사분실로 이송하여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때가 27일 오전 2시30분쯤이었다.
그당시 김재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하면 『정승화는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시킨 사람이다. 당시 국방장관은 3군사령관을 참모총장으로 밀고 있었으나 내가 1군사령관인 정장군을 박 대통령께 강력히 추천해 총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하게 되어있다』고 말하고 김재규 자신의 지시에 따라 정승화총장을 범행장소에서 36㎞ 떨어져 있는 궁정동 안가에 대기시켰다는 것이다.
김재규의 계획은 박 대통령을 암살하고 비상계엄을 선포케 한 다음 군사혁명으로 유도해 정 총장을 비롯,군고위층을 조종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이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거하여 수사관들은 정승화총장이 김재규의 공범 내지 방조범 아니면 배후의 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10월27일 오전 11시쯤 본인에게 정총장을 연행 수사해야겠다는 건의를 해왔다. 만일 이 시기를 놓치면 증거를 인멸시켜 버릴 우려가 있고,수사진행을 방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릴 염려마저 있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수사관들로서는 정승화에 대해 많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육군참모총장이 할 일 없이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현장 근처에 두시간 가량이나 머물러 있었느냐는 것이고,근접한 위치에서 수십발의 총성이 들려왔는데도 대통령이 근처에 있는 줄 알면서 당장 진상을 알아보려고 안한 것은 30여년 군에 복무하여 군의 최고 직위까지 오른 사람의 습성으로 보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고 피묻은 셔츠 바람에 맨발로 달려온 김재규를 목격했으면서도 경위를 알아보기도 전에 같은 자동차를 탔다는 것,김재규는 여섯발을 장전한 권총으로 다섯발을 쏘고 한발이 남은 권총을 허리춤에 꽂고 있었으니 김재규의 몸에서 화약 냄새가 났을 것임에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고 차안에서 김재규가 수행원의 상의와 구두를 빌려입고 신고 하는 동작이 있었는데도 그냥 넘겨버렸고,육군본부에 도착하고서도 별다른 조치없이 김재규가 하자는 대로 군 이동을 한 것 등으로 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사관들의 의견이었고 당시 저자신의 의견이기도 하다.
본인은 처음엔 수사관들의 건의에 구두승인을 내렸다가 나라의 전반적 정세에 생각이 미쳐 그 승인을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당분간은 계엄령의 질서하에 국내 치안 확립이 시급한 일이었고,북한 남침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계엄사령관에 임명된지 일곱시간 밖에 안된 정 총장을 연행하는 사태가 생기면 혼란을 더욱 격화시키게 될지 모른다는 판단이니다. 도피의 우려도 희박하고 증거인멸을 한다 해도 그 범위는 뻔할 것이니 정세가 안정된 후에 수사를 전개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도 있어 그대로 수사관을 타일렀던 것이다.
그런데 외신보도와 국내언론을 통해 시해사건에 정 총장이 관련되지 않았는가 하는 설이 나돌게 되자 정 총장은 자신이 스스로 조사를 받겠다고 간청했다. 그 자청에 따라 10월29일부터 11월1일까지 4일간 합수부 조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실에 출두하여 매일 두시간정도 정 총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게 되었다. 이때 수사관들은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직위를 이용하여 위압감을 조성함으로써 순리적인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보고한 바 있다. 그런데다 정 총장은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하여 전후 네차례에 걸쳐 수정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조서를 총장실로 가져오라고 해 자신이 조서 내용을 직접 고치기까지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승화총장의 10ㆍ26시해사건 관련 의혹이 짙어만 갔다. 많은 억측이 유언비어가 되어 항간에 범람했다. 동시에 본인의 정 총장에 대한 의혹도 쉽사리 불식될 수 없었다. 의혹의 초점은 다음과 같다.
국가원수 시해사건이 김재규의 단독 범행일 까닭이 없다.
사후에 무슨 확고한 계략이 없이 단독으로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후에 정승화장군을 비롯한 군의 일부가 관련되어 있다. 그 증거의 일단이 10ㆍ26 범행당시 정총장이 범행 현장의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설혹 이것이 가설이었다고 해도 수사 책임을 맡은 사람은 명명백백한 반증이 없는 이상 가볍게 그 가설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며 그래서도 안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가설이 아니고 사실이라면 김재규사건이 마무리 되기 전에 쿠데타가 유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설이 가설이 아니고 사실이었을 때의 사태를 미리 감안하고 행동하는 것이 수사책임자가 명심할 대목인 것이다.
이러한 의혹을 가지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동안 추가로 밝혀진 사실이 있었다. 시해사건직후 육군본부에 같이 도착한 자리에서 정 총장은 김재규에게 당시에 부대배치 상황을 보고하고 김재규의 지시에 따라 제9공수여단을 육군본부로 출동시킨 사실이다. 군의 주요부대 이동은 국방장관과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야 할 것인데 그런 절차도 없이 취한 조치다.
그무렵 항간에는 미국의 정보기관이 시해사건에 관련돼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본인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첩보도 있었다.
재야 일각에서 김재규 규명운동과 함께 김재규를 민주투사로서 영웅시하려는 여론보도경향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는데 정 총장은 이런 경향을 방관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 한편 정 총장은 계엄사령관이된 후 수도권부대를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이 장악하도록 했다. 심지어는 10ㆍ26이후에 충정부대의 핵심인 수도경비사령관에 자신이 신임하는 사람을 임명하고 중앙정보부장 서리에는 역시 자기와 가까운 이희성 육군참모차장을 임명하는 등 요직인사를 단행했던 것이다. 이외에 1군단장과 수도군단장은 정 총장과 가까운 사람이었으며 특전사령관 6군단장 3군사령관은 김재규계열로서 보직이 되어있었는데 정총장은 특히 특전사령관과 3군사령관과는 빈번한 접촉이 있었다.
그 무렵부터 정 총장은 육군본부 주요지휘관회의 등에서 3김씨의 자질과 자격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는데,미루어 보건대 자기의 정치적 의도를 그런 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무렵부터 중앙정보부는 합수본부와의 정보협조를 기피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수사의 총책임자로서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합수본부장으로서 대통령시해사건이야 말로 중대한 사건인 만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사에 성역이 없다는 신념하에 정확한 전모를 신명을 걸고 밝혀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 남은 작업은 정 총장의 혐의를 조사하여 그 의혹을 말끔히 없애는 일이었다. 만일 이에 대한 흑백이 가려지지 않는다면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물론 군 자체의 기강이 흔들리는 동시 마침내는 군이 분열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1월께 본인은 모든 상황을 노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건의하였더니 『좀 더 두고보자』고 했고 그후 최 대통령에게 건의드렸더니 『국방장관과 상의하라』고 말씀하시어 본인으로서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정 총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 내부에 강력한 지지세력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그러니 그를 조사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모한 노릇이었다. 목숨을 걸어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으며 그야말로 구국적인 소신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평상시 본인은 미국의 케네디대통령 암살사건이 영원한 미궁에 빠져버린 것을 미국의 수치라고 생각해왔다.
광주사태가 특별한 의도에 의해 촉발됐다는 주장은 전혀 오해에서 비롯됐다. 본인은 물론 어느 누구라도 집권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면 광주사태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오히려 바랐을 것이다. 그 책임이 어떻게 되든 당시 군과 정부의 요직에 있던 본인으로서 책임의 일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재임기간 중에 「상처는 아물기 전에 건드리면 다시 커져 치유가 어렵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상처를 근원적으로 치유,해결치 못한 점에 대해 깊은 반성과 자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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