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마을 성탄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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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성탄전야 24일 밤.
80년대의 마지막 성탄전야를 원없이 보내겠다는 듯 서울 강남의 유흥가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손님올 유혹했고 시내 유명호텔은 어린이를 위한 성탄절 프로그램으로 만원을 이뤘다.
그러나 같은 시각 서울 서초동 꽃마을 철거대상 지역에서는 경제정의 실천 시민연합(경실련)주최의「도시빈민을 위한 성탄예배」가 철거민·지역교인 등 1천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상에서 조촐하게 열렸다.
『예수님께서 오늘 다시 오신다면 어디로 오시겠습니까.』이 예배를 주최한 경실련 상임 집행위원장 서경석 목사(40)는 이런 질문을 우리사회에 던지고자 이번 행사를 계획했다고 말했다.
조악한 나무십자가와 1천여개의 촛불 외엔 그 흔한 크리스마스 트리 하나 없는 소박한 예배였지만 그 어느 성탄 예배보다 참석자들은 엄숙하고도 진지했다.
『호화찬란한 장식 속의「즐거운 성탄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닐하우스 속에서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공포 속에 떨고있는「슬픈 성탄절」도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이날 설교를 맡은 김진홍 목사(49)는「슬픈 성탄절」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이들의 아픔을 달래주었다.『여러 곳에 호소도 해보았고 데모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내년 봄엔 여기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얇은 골판지 한장만을 깔고 앉아 한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예배를 보던 한 할머니는 눈시울을 적시며 말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를 위해 오신 아기예수의 탄생. 90년대에는「나눔의 실천」을 통해 우리 모두「즐거운 성탄절」을 맞을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박수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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