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침공은 시대 역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미군의 파나마 침공은 모처럼 화해와 평화공존의 분위기가 싹트고 있는 국제정치 분위기의 앞날을 위해 불행한 일이다.
미·파나마 양국간의 문제나 파나마를 마치 무법자처럼 통치해온 노리에가 장군의 행적 속에 분쟁의 요소가 쌓여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강대국의 주변 약소국 무력침공을 정당화시킬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번 침공이 제기한 주된 쟁점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철군중이며 남아가 오랜 나미비아내정간섭에서 손을 떼고 있는 등 강대국의 무력개입시대가 후퇴하고 있는 이 시대에 그런 화해의 흐름에 역행하는 행동을 미국이 외교분쟁해결의 수단으로 썼다는 점이다.
우리는 쿠데타 위협으로부터 아키노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이 동원된 최근의 필리핀 내정개입과 마찬가지로 이번 파나마 침공이 비록 그 목적에는 수긍할만한 점이 있지만 수단은 나빴다고 본다.
이 두 경우는 모두 자력으로 문민정치체제를 지키는데 역부족인 나라에 대해 강대국이 조력을 함으로써 군사통치의 위협을 제거해 줬다고 미국은 강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의 결과가 비록 그런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각 나라의 문민정치가 자력에 의해 뿌리내릴 때만 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한다.
그것이 지금 동구권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움트고 있는 자주노선의 기본이다. 미국의 파나마 침공은 이 대세를 거스른 것이다.
원칙론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외교분쟁이나 상대국 내정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무력을 동원하는 행동은 시대착오적이다. 미국은 소련과 동구의 개혁혼란이 스스로 포기한다고 했던 「세계 경찰역」을 되살릴 호기로 보고 있다면 그것은 중대한 오산이라고 본다.
이번 침공은 단발성 예의가 되지 않는 나쁜 선례가 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부시 행정부는 미군개입의 근거로 노리에가의 독재와 부당한 반미운동강화, 마약밀매 등을 들면서 그대로 방치한다면 파나마가 제2의 쿠바가 될 소지가 있음을 우려한 것 같다.
특히 지난 15일 노리에가는 미국에 대해 일전불사선언을 하고 바로 다음날 미장교 1명이 살해된 사건이 발생, 미국은 파나마주둔 미군과 미국 민간인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자위권」를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는게 미 관리들의 배경 설명이다.
게다가 대외적으로 민족적 반제외교를 제창하면서 대내적으로는 군부독재체제를 강화하고 있던 노리에가가 미국의 최대 사회문제인 마약밀매에도 깊숙이 관련, 2년 전 미 법원으로부터 기소돼 있는 입장이어서 적어도 미국 내에선 이번 사태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번 미군의 파나마 침공은 당장 중남미 각국의 대미감정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며 긴급 소집된 유엔안보리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행동은 국가주권의 군사적 침해라는 측면에서 국제사회에 큰 파문을 몰고 올 것이며 그런 면에서도 부시행정부는 이번 행동의 결과와 관계없이 대단히 위험스런 도박을 한 셈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