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사진전문기자의네모세상] 선운사 도솔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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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동백꽃이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날 선운사를 찾아가 보라 합니다. 또 다른 이는 그리움에 사무쳐 꽃으로 피는 꽃무릇이 하늘거리는 날 가서 보라 합니다. 또 누구는 빨간 아기단풍이 소슬바람에 가녀리게 떨다가 꽃비로 도솔천을 물들이는 날 꼭 가서 보라 합니다.

이도 저도 아닌 한여름, 선운사 도솔천을 찾았습니다. 새벽을 여는 첫 햇살마저 뜨거운 열기를 뿜는 한여름이지만 도솔천엔 싱그러운 바람이 감돕니다. 우거진 녹음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마저 이내 뜨거움을 잃습니다. 선운산(도솔산)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차디찬 도솔천의 품 안에 들면 무엇이든 싱그러워지게 마련인가 봅니다.

수면을 낮게 날며 깃을 식히는 멧새들도, 위태롭게 나뭇가지를 타다 쪼르르 물가로 달려든 다람쥐도, 차마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숲을 맴도는 물안개도, 함초롬히 이슬을 주렁주렁 단 거미줄도, 이끼 낀 돌 틈에서 아무렇게나 핀 풀 한 포기도, 바지 걷을 새도 없이 계곡으로 첨벙 뛰어든 꼬맹이도 도솔천에선 죄다 싱그럽습니다.

'한여름의 선운사 도솔천'에 가신 적이 있나요?

구태여 동백꽃, 꽃무릇, 아기단풍이 아니더라도 바람 한 자락마저 싱그러울 겝니다. 숲을 비집고 퍼져오는 햇살은 매력 있는 사진의 소재입니다. 쉽게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조건만 맞으면 어디서건 카메라에 담을 수 있습니다. 빛을 산란해주는 안개가 피는 날의 숲이면 기본조건은 갖추어진 셈입니다. 게다가 이른 새벽 햇살이 낮은 데서 비춰오고 그 빛이 역광이거나 측광이면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 됩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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