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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두루마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조선조 중종 때의 선비 박영의 후손들은 대대로 옷자락이 잘린 두루마기 한 벌을 가보로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 두루마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박영이 어느 날 저녁 좋은 옷을 입고 남대문근처 골목길을 가고 있는데 한 미색의 여인이 그에게 다가와 은근히 소매를 잡아끌었다. 여인을 따라 어느 집에 이르니 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이 『공의 풍채를 보아하니 여느 사람 같지가 않은데 나 때문에 오늘 비명에 죽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여인은 도둑의 앞잡이였고 그는 그 날 도둑의 소굴에 끌려 들어간 것이다.
간신히 도둑들을 물리치고 나니 이번에는 그 여인이 딴마음을 품고 그의 두루마기 자락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박영은 칼을 뽑아 여인의 손에 잡힌 옷자락을 자르고 그 집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 『기제잡기』에 나오는 얘기다.
옛 사람들은 「피색여피수」라고 하여 「여색 피하기를 원수같이 하라」고 했다. 「계색」-, 이것은 특히 공직자들이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선조조 때의 명신 한음 이덕형에게도 이런 일화가 있다.
임신왜란을 겪고 창덕궁을 수리할 때 선조는 대소사를 한음에게 맡겨 잠시도 대궐을 뜰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음은 소첩을 대궐문밖에 거처하게 하여 뒷바라지를 시켰다.
하루는 몹시 갈증을 느낀 채 작은집에 들르니 소첩은 묻지도 않고 시원한 화채 한 그릇을 얼음에 채워 내왔다. 한음은 화채를 달게 마시고 난 후 뜻밖에 『이제부터 나는 이 집에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가버렸다.
소첩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연유를 알 수 없어 한음의 죽마고우 백사 이항복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다.
뒷날 백사가 그 까닭을 묻자 한음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 계집이 얼굴도 일색인데다 마음씀이 그리 영리하니 국사가 바쁜 터에 자칫 내 마음이 빠질까봐 그리했네.』
신문을 보면 환갑을 눈앞에 둔 경찰 고위간부가 사귀던 20대 여인이 시집을 가자 그 집에 찾아가 권총까지 쏘며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아무리 공직사회의 기강이 허물어졌다고 해도 이건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가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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