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열사의 난공사…무사귀국이 꿈|「대수로」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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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건강한 몸으로 김포에 내리자.』
사하라 사막 한복판 리비아 대수로 공사의 핵심 기지인 동아건설 사리르 공장 곳곳에는 이런 팻말이 있다.
수억 만리 이국 땅 열사의 나라에 돈벌러 와 몸을 다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

<교통사고 잦아>
처음 나와 일교차가 20∼30도나 되는 이곳 기후에 적응이 안돼 감기 몸살이라도 앓아 숙소에 혼자 누워 있으면 정말 집 생각이 간절하다.
그래도 감기 정도야 약 먹고 며칠 쉬면 나을 수 있지만 작업 현장에서 안전사고라도 당하는 날이면 그야말로 앞이 막막해진다.
웬만한 수술정도는 해낼 수 있는 의료시설은 갖추었지만 가끔 심한 사고를 당해 성치 않은 몸으로 귀국하는 동료를 보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라고 한 근로자는 말한다.
그러나 어느 작업장에서나 그렇듯 사고는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교통사고가 많다.
작년 여름엔 허허로운 사막 길을 혼자 시멘트 수송트럭을 몰고 가던 근로자가 깜빡 조는 바람에 차가 모래밭으로 빠지면서 전복돼 목숨을 잃기도 했다.
매일 같이 몇십t짜리 중기를 접하는 근로자들은 그 중량감에 무뎌지는 경우가 많아 의외의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대수로 공사에 따른 수송업무를 전담하고있는 대한 통운의 조규팔 이사는 『근로자들에게 수시로 중량감을 일깨워주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경제가 국제화됨에 따라 세계 곳곳에 한국인의 발길과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거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중동건설 현장만큼 많은 애환이 서린 곳도 없는 듯 싶다.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70년대 후반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한 중동은 당시 일자리를 못 구해 서성대던 많은 국내 기능공들에겐 황금의 일터로 떠올랐다. 한 2년 고생하면 큰 목돈을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동에 나가려는 근로자들의 행렬이 건설회사마다 장사진을 이루었으며 송출알선 브로커들에게 사례금을 집어주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82년 이후 기름 값이 떨어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중동시장은 지금은 별것 아니게 됐다.
82년 말 중동에 나가있던 우리 근로자들이 최고 l7만명에 달했던 것이 지금은 10분의 1인 1만7천명 선으로 격감한 것이 그 같은 퇴조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근로자들이 해외건설 시장을 꺼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건설경기 자체가 시든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국내의 임금사정이 좋아져 같은 일을 할 경우 국내에서의 돈벌이가 해외보다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생스러운 줄 알면서 중동이라도 나가지 않으면 안될 사람은 아직도 많다. 대수로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동아건설 근로자 3천 여명도 그런 사람들이다.
리비아 제2의 수도 벵가지로부터 2백40여㎞ 떨어진 브레가 송수관 공장에서 만난 이태욱씨(32)는『돈 좀 모으려고 왔다』고 취업동기를 밝힌다.
이곳에서 철골비계(주 공사를 위한 철구조물 설치작업) 일을 보고 있는 그는 한 달에 하루정도만 쉬고 받는 월급이 65만원 선이다. 작업을 좀 많이 할 때면 70만원 정도가 된다.
여기 오기 전 국내에서 한달에 최고 1백20만원(일당 3만∼5만원)까지 벌어 봤으니 이곳 임금이 그리 좋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매일매일 일거리가 보장되지 않고 또 돈을 좀 벌었다 싶으면 씀씀이도 커져 좀처럼 목돈을 쥘 수 없었다.
여기서는 월급이 몽땅 국내통장에 입금되기 때문에 2년 정도 일하면 1천5백 만원 정도는 모을 수 있다. 사실 여기서는 돈을 쓸래야 쓸데가 없다. 회교 국가라 술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고 주변이 모두 사막이라 상점도 없기 때문이다.

<돈쓸 곳도 없어>
노름은 회사규정상 첫 번째 가는 금기사항이라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만일 노름하다 적발되면 즉시 귀국 조치된다.
따로 놀 것이 없어 일 하는게 유일한 낙(?)이다. 한 달에 보통 하루, 많아 봤자 이틀 노는게 고작이다. 그것이 잡념을 없애는 한 방편인 동시에 돈도 그만큼 더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중 일과가 끝나면 빨래를 하거나 보고싶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는 휴가자 편을 통해 1주일에 한번씩 모아 전달되며 답신 역시 서울 본사에 모아진 것이 회사우편을 통해 이곳으로 온다.
나머지 시간은 숙소에서 책을 읽거나, 건강 유지를 위해 농구나 축구·테니스·수영 등도 즐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저녁 시간엔 휴게실로 모여든다. 한꺼번에 3백∼4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야말로 운동장 만한 휴게실에는 휴가자들이 가져온 한달 전 신문이 그대로 베니어판에 붙어 있었으며 대형 TV모니터에선 국산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어둠 속 자욱한 담배연기와 발 냄새· 땀 냄새에 찌든 그 공간에 갑자기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근로자들의 시선은 모두 필자에게 집중됐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야, 사진 찍지마』라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사진 찍자 항의>
휴게실을 도망치듯 빠져 나오며 바깥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한 근로자는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며칠 전 돌이 지난 딸애가 제일 보고싶다』고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수로 공사현장은 어느 곳 하나 힘들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리르 공장의 골재 채취장은 인간의 인내력을 시험하기 위해 마련된 곳 같았다.
골재 채취용 특수차량이 사막의 모래를 파 컨베이어 밸트에 올리면 모래는 빠지고 자갈만 걸러지는데 그 과정에서 먼지와 소음은 옆 사람과의 대화를 가로막는다.
차 창문을 꽉 닫고 일하지만 1시간만 있으면 콧수염까지 먼지가 뽀얗게 앉는다. 지평선조차 가물거리는 사막벌판. 한낮 50도까지 올라가는 혹독한 더위 속에서도 그 같은 작업은 계속된다. 3시간마다 작업교대를 한다.
작업장 옆 「달맞이 싸롱」이라는 간이 천막에 잠깐 앉아 쉬노라면 떠오르는게 가족들 얼굴이라고 한다.
고국으로 휴가를 가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가장 손꼽아 기다려지는 일이다.
그러나 휴가자들의 어깨가 축 처져 돌아오는 모습을 볼 때면 이들의 마음은 무거워진다.
해외건설 현장만 8년째인 전규석씨(43)는 지난 7월 휴가를 다녀오면서 뼈를 삭이는 자신의 노동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고 털어놨다.
지난 2년간 노동의 대가로는 서울 봉천동의 월세방을 전세로 옮기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
『아빠, 내가 커서 돈 많이 벌어 올께요』라며 공항에서 울먹이던 둘째 녀석의 눈망울이 너무 초롱초롱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건강한 몸으로 김포에 내리기 위해 내일부터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기로 하자. 전씨는 그렇게 말하며 사막의 일터로 나선다. <글·사진 심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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