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우석칼럼

휴가철 독서여행 3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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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아침 뉴스를 보면 자주 국방을 에워싼 논란이 여전히 뜨겁고 여당 대표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기업인들을 만난다는 소식이 실려 있다. 또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낙마하면서 억울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더운 날씨가 더 덥게 느껴진다. 이럴 땐 차라리 독서여행이라도 떠나는 게 좋겠다.

'조선조실록'을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한다. 우리 조상은 어떻게 이렇게 방대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까. 광해군 편('조선왕조실록-조선의 전쟁과 평화', 김용삼 지음)을 보면 국제 정세의 격동 속에 흔들리는 안보 상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신흥 세력 청나라의 대두와 안보 위협에 대해 대부분 무감각하다. 그래서 태평스럽게 큰소리만 가득하다. 임진왜란을 몸으로 겪은 광해군은 아무래도 불안하여 군비 증강을 서두는 한편 줄타기 외교도 서슴지 않는다. 국제 정세에 둔감한 신하들이 계속 명분론을 내세우자 "지금 바깥 정세가 긴박하다. 고상한 말과 큰소리만으로 흉악한 적들의 칼날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막상 적들이 쳐들어올 땐 고상한 담론으로 막을 것인가, 붓으로 무찌를 것인가"하고 야단을 친다. 그 광해군이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해 쫓겨나고 얼마 안 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연이어 일어난다. 큰소리친 사람들은 속수무책이고 나라는 쑥밭이 되어 백성은 죽을 고생을 한다. 광해군이 지금 돌아온다면 어떤 말을 할 것인가. "병자호란 때도 보았지요. 큰소리치는 사람 믿어선 안 됩니다. '적국이 전쟁을 안 일으킨다고 믿을 게 아니라 방비를 단단히 하여 일으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옛말을 믿어야 합니다"라는 말일 것이다.

요즘 칭기즈칸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왔다. 칭기즈칸은 위대한 정복자였을 뿐 아니라 정복한 땅을 다스리는 데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좋은 인재를 폭넓게 등용하고 여러 창조적 시스템을 만들었다. 항상 배우려고 했다. 노년에 들어 칭기즈칸은 당대의 현자(賢者)인 장춘진인(長春眞人)을 초빙해 만났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세월이 얼마 없소. 어디 장생불로(長生不老)하는 묘법은 없겠소"하고 묻자 "폐하, 평소 섭생을 잘하여 오래 사는 방법은 있어도 장생불로하는 묘법은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한다. 여당 대표가 장춘진인을 만나 "요즘 경제가 안 좋아 걱정인데 좋은 방법이 없겠소"하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경제에 기사회생하는 묘법은 없습니다. 경제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분위기를 확 바꿔 꾸준히 노력해야 겨우 싹이 돋아날 것입니다"라는 것이 아닐까.

요즘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유난히 많다. 그래서 고 홍사익(洪思翊) 중장의 기록('홍사익 중장의 처형',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을 다시 봤다. 홍 장군은 일제시대에 육사와 육군대학을 나와 중장까지 올라갔다. 그 때문에 친일 인물 명단에도 올라가 있다. 원래 대한제국의 군인이었는데 일본 유년학교에 파견 유학을 갔다가 한일병합 때문에 그대로 일본 군인이 된 것이다. 광복군 사령관인 지청천(池靑天) 장군과 육사 동기인데 같이 일하자는 권유를 비밀리에 받았다. 그때 홍 장군은 "지금 조선 출신 중에 가장 계급이 높은 내가 어떻게 탈출할 수 있겠는가"하면서 거절했다 한다. 남는 사람에 대한 걱정도 한 것으로 보인다. 홍 장군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남방사령부 병참감이 된다. 직제상 병참부엔 포로수용소 관리도 있었다. 종전 후 홍 장군은 필리핀에서 체포되어 포로 학대 혐의로 전범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일본인 부하들이 맥아더 사령부에 탄원서를 냈으나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았다. 재판 중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형장으로 가면서 "예부터 이 세상에 억울한 죽음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도 거기에 하나를 보탤 뿐"이란 하직 말을 남겼다. 마지막 소원을 묻자 성경 시편 51편을 읽어 달라 하며 조용히 교수대로 올라갔다 한다. 요즘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홍 장군을 한번 상기해 보는 것도 좋겠다.

최우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