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우리말 지킨 마지막 선비|일석 이희승 박사 일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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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우리말을 갈고 닦는데 평생을 몸바쳐온 일석 이희승 선생은 국어학의 태두이자 우리 시대 마지막 선비였다.
1896년 경기도 개풍에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난 일석은 한성 외국어학교·양정의숙·중앙고보 등에서 수학했고 이때 주시경 선생의 『국어 문법』을 읽고 감명 받아 우리말 연구의 가시밭길로 들어섰다.
한때 인촌이 경영하던 경성방직에서 근무했던 일석은 30세에 경성제대 조선어 문학과에 입학, 본격적으로 국어 연구를 시작했다. 1930년 졸업한 그는 경성사범과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이때 이화여전 동료 교수였던 시인 정지용이 일석이란 아호를 지어줬다.
교편 생활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어학회에 참여, 35년부터는 간사장을 맡아 최현배·김윤경·정인승 선생 등과 한글 보급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했다.
일석은 특히 훈민정음 연구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 국어 학계에 언어학의 기초와 체계에 입각, 국어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연 개척자로 평가되고 있다.
1942년에는 일제의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해방 때까지 만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취임,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61년 정년 퇴임했다.
서울대 재직 중 『조선어학논고』 『국어학개설』 『국어대사전』 등 국어학 연구의 고전을 저술했으며, 50년대 말부터는 외솔과 문법 논쟁을 벌여 국어 학계에 양대 학맥을 이루었다.
정년 퇴임 후에도 서울대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할 때까지 명예 교수로 대학원 강의를 계속한 일석은 63년부터 2년간 유일한 외도인 동아일보 사장직을 맡기도 했으나 대구대·성대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면서 교단을 떠나지 않았다. 71년부터 10년 동안은 단국대 동양학 연구소를 맡아 『동양학총서』『이십오사초』 등을 퍼냈다.
『딸각발이』 『벙어리냉가슴』 등 유명한 수필도 남긴 일석은 지난해 4월 92세의 고령에도 네번째 수필집 『메아리 없는 넋두리』를 내놓는 등 그의 일생은 지칠 줄 모르는 학문에의 정렬과 애정으로 점철됐다.
67년부터 현정회 이사장으로 단군 성전 건립 등 단군의 얼을 계승하는데도 앞장서온 일 석은 75년 후두임파선 암으로 두 차례 수술을 받은 후로는 동숭동 자택에서 독서를 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일석은 마지막 생일이었던 지난 6월9일 자신이 평생동안 모은 2억원을 후학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고 싶다고 말했으며 유가족들은 그의 견지에 따라 일석 장학회를 설립할 예정이다. <유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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