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파도」 프라하에 넘실-체코 격동의 현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4O년의 전체주의 통치를 일거에 허물어버린 현장-. 공산당 정권통치가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변혁은 「민중의 힘」 이 거둔 또 하나의 승리다.
폴란드· 동독에 이어 민중시위로 대변혁의 첫발을 내디딘 체코는 소련· 불가리아 등 인접 동구국가의 「위로부터의 개혁」 파는 다른 정치변혁을 또 하나 기록했다.
야케스 서기장의 체코공산당통치체제가 퇴진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지난 17일의 프라하 대 시위가 시발이었으며 지난 20일의 프라하시 중심부 바츨라브가 30만 시위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지난 17일의 프라하 대 시위는 세계학생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로 시작됐다.
체코는 지난 1939년 나치군의 침공과 함께 프라하 대 의과대학생 얀 오플레탈군이 피살되고 이어 체코 전국대학이 폐쇄되는 비운을 겪었었다.
체코 대학폐쇄가 시작된 지난 17일은 1941년 세계학생의 날로 지정됐었다.
17일의 프라하 대 시위는 저항하는 체코대학생의 투쟁정신을 되살리고 후사크와 야케스로 이어져온 지난 40년 공산정권의 강압정치를 비판하는 대 토론장이었다.
「야케스 물러가라」 「야케스를 쓰레기통에」등 격렬한 반정부구호가 난무했다. 이 구호가 나온 지 1주일만에 현실로 나타났다.
웅장한 5∼7층의 석조대학건물 사이로 난 십자로에서 시작된 이날 시위는 「개혁」 과 「공산정부 퇴진 」 「대화」 요구가 주 내용이었으며 이후 야케스의 사임까지 7일간 계속된 체코 사태의 봉화 불이 됐었다.
18, 19일의 크고 작은 시위에 이어 20일의 바츨라브가를 뒤덮은 학생· 시민 등 30만 「민중」 은 오후 4시 이미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폭 1백m, 길이 1㎞에 이르는 광장을 개혁을 요구하는 절규로 가득 메웠다.
국립박물관 앞 성 바츨라브 기마 동상 앞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한 시위대는 갖가지 플래카드와 체코국기를 흔들며 「새 역사」를 향해 힘을 뭉쳤다.
격렬한 구호에 이어 체코국가를 제창할 때는 시위대 모두가 정지, 쓰고있던 모자를 벗고 경건한 차렷 자세를 취했다.
국가제창이 끝나면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이 다시 광장을 격동시켰다.
20일 프라하시의 민중시위는 가두행진으로 이어지며 거리 양쪽 빌딩에서는 많은 시위동조자들이 내건 대형 체코국기로 더욱 일체감을 더했다.
프라하시의 이날 시위현장은 국민의 단합된 힘이 강물처럼 도도하게 물결치며 역사의 새 물길을 트는 하나의 커다란 파노라마였다.
글· 사진=진창욱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