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지렁이로 된 까닭은|김영희<본사이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경제에 관해 들리느니 어두운 소식뿐이다. 86년부터 작년까지 3년 연속 두 자리수의 성장을 기록한 국민총생산(GNP)이 올해는 그 절반수준인 6·5%선으로 뚝 떨어진다는 게 경제기획원의 전망이다. 개인소득이 배가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국민총생산의 성장률이 10% 면 7·24년, 5%면 14·02년 걸린다는 경제학자들의 계산이 옳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우리의 개인소득은 4천 달러를 겨우 넘어섰다.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개인소득 4천 달러는 각종 갈등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시기로 통한다. 마치 이런 통설을 입증이나 하듯 우리사회는 지금 무엇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 없이 뒤죽박죽이다. 4천 달러 증후군을 한시 바삐 탈출해 선진국의「시민권」이라는 1만 달러 고개를 넘어서자면 서기 2000년까지는 지금까지의 고속 성장가도를 숨차게 달려야 하는데 객관적인 형편은 암담하기만 하다.
서기 2000년 이전에 개인소득 1만 달러선을 넘어야하는 더욱 급박한 이유는 인구 동향쪽에 있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덕에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89년의 4·6%에서 2000년에 6·4%,지금부터 30년 뒤가 되는 2020년에는 11·5%로 85년의 무려 2·3 배가된다고 한다. 한 나라의 인구에서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으면 노동인구가 상대적으로 줄뿐만 아니라 복지수요가 폭발해 경제의 고도성장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갈 길이 바쁘다.
그런데 우리 경제형편은 어떤가. 이제는 불황이라는 말로는 그 어려움의 깊이를 표현할 수 없게 되었다. 경제위기라는 표현을 쓰는데 주저하는 사람이 없다. 경제기획원 장관도 마침내 우리 경제의 잠재력이 한계점에 왔음을 시인한다. 우리 눈앞에는 악재만 보인다. 휴일을 잔뜩 늘려 가지고 바다로, 산으로, 들로 정신없이 몰려다니다 보니 제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한달 평균 근로시간이 86년의 2백37시간에서 올해는 2백22시간으로 떨어졌다. 내년에는 또 얼마나 떨어질 것인가.
일하는 시간이 줄어도 노동생산성만 올라주면 『노세 노세』로 생긴 손실이 보상되지만 노동 생산성은 그것대로 심각한 지경까지 떨어지고 있으니 예삿일이 아니다.
노동생산성의 증가율은 86년에 15·2%, 87년에 16%로 크게 올랐다가 작년에 12%로 반전을 시작하더니 올 상반기에는 드디어 7·1%로 곤두박질했다. 휴가에, 과소비에, 파업에 들떠있는 판에 노동생산성이 안 떨어진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생산성 저하는 생산의 마무리작업에 그대로 반영되어 수출품검사에서 불 합격률이 88년의 평균 3%에서 금년 1월에서 8월 사이에는 3·9%로 악화되었다. 일본의 1·5%, 대만의 2·5%와 비교해보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 합격률이 30%가 넘는 수출업체가 적지 않다는 기업인들의 불평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러니 내년도 기업의 시설투자의 증가율이 82년 이후 최저를 기록한다는 것도 설득력 있는 전망이다.
워싱턴포스트가 한국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다고 꼬집어 뜻 있는 한국인들을 부끄럽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프랑스의 피가로가 한국은 이제 아시아의 용이 아니라 한 마리의 지렁이로 전락했다고 말한다. 중동건설 진출이다, 수출호황이다 하면서 경제 좀 잘된다고 오도방정을 떨던 깜냥이 있어서 용이 하다못해 뱀도 아니고 지렁이가 되었다는 핀잔을 받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우리 경제가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대강 안다. 경제기획원장관은 오늘의 위기를 국민들이 자기 몫을 너무 챙기는 탓으로 돌렸다. 노사분규에, 놀자판에, 생산성을 훨씬 웃도는 임금인상 등을 보면 그의 말 그대로다. 기업의 투자의욕을 부추길만한 자극이 없다. 마산 수출자유 지역의 외국기업은 그 동안 빨아들인 단물을 챙겨 가지고 슬금슬금 한국을 떠난다. 국내기업도 마찬가지다. 국경을 모르는 후조라고 하는 자본이 해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경제위기의 원인이 경제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안다. 미래를 예측 할수 없을 때 가장 불안한게 인간이다. 하물며 경제랴. 정치 판을 보라. 무엇 한가지 예측 가능한 것이 없다. 5공 청산 하나만 봐도 이제는 그 단어의 뜻이 탈색 될 정도가 되었지만 5공이 언제 청산되고, 정치가 언제 제 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특히 여당은 특정인의 사퇴문제 하나 조속히 결말짓지 못하고 당력과 국력을 소모하고 있어 경제를 위한 정치환경의 악화에 기여하고 있다.
물 정부는 필요할 경우에도 효과적인 물 정부가 되지를 못하고 있다.. 기껏 공안정국을 가지고 통치능력으로 혼돈을 하고있다.
정부는 꼭 여론이라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다. 그리고 높으나 낮으나 관리들은 정치하는 사람들을 닮아 가지고 주로「감공봉사」하는 일에만 열심이다. 국제정치 정세는 정신없이 급변하고, 미국의 통상압력과 경제의 새삼스러운 블록화는 사정없이 우리 목을 죄어 오는데 정치권과 정부는 비전 있는 사고를 멈추고 불치의 무력증에 걸린 것 같다.
개인소득 4천 달러와 1만 달러의 차이는 단순히 6천 달러라는 숫자가 아니다. 그 둘은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 중진국과 선진국의 갈림길이다. 한강의 기적이니, 아시아의 용이니 하는 칭송을 들으면서 4천 달러까지 달려 온 우리가 여기서 주저앉을 것인가. 멕시코처럼 올림픽 한번 치르고 진전을 멈출 것인가. 노사도, 운동권 학생도, 기업인도, 정부도, 정치인도 민주화 과정에서 분출되고 있는 「감공 봉사적」욕구를 긴 눈으로 조정하지 않으면 4천달러의 분수령을 넘는 기회를 놓치고 민주화로 얻는 것은 사회주의국가들처럼 부의 하향평준화와 가난의 평등뿐일 것이다. <본사이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