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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가 라바리니, 배려·존중으로 선수들 춤추게 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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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8호 05면

여자배구 기적 만드는 두 리더십 

친구에게 장난치듯 라바리니 감독 어깨를 토닥이는 김희진. [KOVO 유튜브]

친구에게 장난치듯 라바리니 감독 어깨를 토닥이는 김희진. [KOVO 유튜브]

지난 3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스타디움. 한국 여자배구대표팀이 8강전에서 터키를 꺾자 스테파노 라바리니(42·이탈리아) 감독이 코트로 뛰쳐나갔다. 그는 기뻐하는 선수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격의 없이 축하를 주고받는 이들의 모습은 사제(師弟)지간이라기보단 동료 같았다.

선수 출신 아니라 ‘라떼’ 훈계 안 해 #다치면 “배구 인생 길다” 출전 만류 #상대 정확하게 분석해 맞춤 전략 #선수 장점 살려 적재적소 투입 #친구 같지만 치밀·냉정한 승부사

라바리니 감독은 경기 중엔 누구보다 냉정하고 치밀한 사람이다. 8강전 터닝포인트 중 하나는 4세트까지 벤치에 있던 박은진(22·KGC인삼공사)을 5세트 선발로 투입한 거였다. 그는 예리한 서브로 리시브 라인을 흔들어 역전을 이끌었다. 대표팀 막내급인 박은진은 “감독님이 서브 지점을 일일이 알려줬다”고 전했다.

터키전을 마친 뒤 라바리니 감독은 거의 모든 선수들 이름을 언급하며 서브를 때릴 때의 장단점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박은진뿐 아니라 안혜진(23·GS칼텍스), 김희진(30·IBK기업은행) 등 서브가 좋은 선수들을 모두 대표팀 명단에 포함했다. 체격과 파워가 뛰어난 팀을 강력한 서브로 흔들겠다는 전략이 명확하게 드러난 선수 구성이었다. 강서브를 넣다 실점해도 라바리니 감독은 “그런 실수는 얼마든지 좋다. 실패가 두려워서 강한 서브를 넣지 않는 게 문제다. 마음껏 때려라”고 말했다. 도쿄올림픽에서 본 것처럼 라바리니 감독은 선수단을 더 강하게 조직하고 있다. 선수들이 그를 리더로서 존경하는 동시에 친구처럼 대한다는 게 느껴졌다. 올림픽 개회 전 세계 랭킹 14위(현재 11위)에 그쳤던 한국 여자배구대표팀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 이후 45년 만의 올림픽 메달에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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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리니 감독은 권위적인 리더가 아니다.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가 반감을 갖는 “라떼는(나 때는) 말이야”는 말을 아예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라바리니 감독은 배구 선수로 뛰어본 적이 없기에 ‘라떼’가 없다. 그래서 훈계할 게 없다.

그는 단지 배구를 좋아했다. 10대 시절 배구 공부를 시작해 16세 나이에 유소년 배구팀 어시스턴트 코치가 됐다. 이후 이탈리아 청소년 대표팀 코치를 거쳐 유명 클럽팀을 차례로 맡았다. 그래서인지 선수들을 존중하는 태도가 몸에 익었다.

지난해 태국에서 열린 올림픽 예선을 마치고 돌아온 김희진은 “눈물이 났다”고 했다. 종아리 부상과 소속팀과 다른 포지션을 맡느라 힘들 때였다. 라바리니 감독은 김희진에게 “넌 나의 어포지트(라이트 공격수)”라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김희진은 “감독님이 곰 인형을 가리키며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배구를 하는 널 보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힘이 났다”고 했다. 김희진과 라바리니 감독은 평소에도 장난을 치는 사이다. 라바리니 감독의 통역원이 “한국에서는 감독의 위치가 높다”고 하자, 그는 김희진과 키를 재더니 “나보다 (선수가) 더 큰데?”라고 말한 동영상이 화제가 됐다.

올림픽 예선에서 대표팀 에이스 김연경이 복근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당시 라바리니 감독은 “네 배구 인생은 길다”며 그의 결승 출전을 만류했다. 하지만 김연경은 “감독님 배려가 너무 고마웠다”며 오히려 이를 악물고 뛰어 이겼다. 존중과 배려를 통해 선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라바리니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그런데도 라바리니 감독은 권위가 있다. 스스로 내세우는 권위가 아니라 선수들이 그의 실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대표팀 세터 염혜선(30·KGC인삼공사)은 “라바리니 감독님은 플레이 하나하나를 할 때마다 고칠 점을 알려줬다. ‘1토스 1평가’였다”고 했다. 센터 양효진(32·현대건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양효진은 “로테이션이 한 번 바뀔 때마다 감독님이 지시를 내린다. 처음에는 너무 복잡해서 따라가기 힘들었다”고 했다.

라바리니 감독과 함께 온 수석코치 세자르 에르난데스도 뛰어난 전략가다. 그는 세계 최정상급 클럽인 터키 바키프방프에 있다. 라바리니 감독 덕분에 한국에 왔다. 둘은 선수들을 감정적으로 다그치는 게 아니라 기술적으로 개선하길 요구했다. 선수들이 어려워해도 일관성을 가지고 주문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한국대표팀은 도쿄올림픽에서 강한 팀워크를 만들었다.

2018년 브라질 미나스 테니스 클럽 사령탑이었던 라바리니 감독은 세계클럽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그와 결승에서 맞붙은 팀은 김연경이 뛰고 있던 엑자시바시(터키)였다. 두 배구 고수가 서로를 알아본 경기였다. 마침 한국대표팀은 세계적인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외국인 지도자 영입을 고려 중이었다. 오한남 대한배구협회장은 김연경과 대화하다 라바리니 감독을 후보 중 하나로 생각하게 됐다. 결국 라바리니 감독과 김연경은 도쿄올림픽에서 여자배구의 새 역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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