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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산재 예방 손놓고 있다가…사고 터져야 나타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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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산업안전 패러다임 바꾸자 

지난 4월 경기도 평택항의 이선호씨 사망사건 등 최근 들어 항만에서 산재 사고가 빈발하고 있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항운노련과 안전대책 논의를 하고 있다. 복잡한 내부 사정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전엔 활동시간의 10% 안팎 할애 #하청 산재 나면 “우리가 채용 안해” #보호구 안 쓰는 근로자들도 문제 #“노조도 안전 지킴이 함께 나서야”

도대체 무슨 사정일까. 항만의 노무관리권은 항운노조에 있다. 채용하고 배치를 한다. 노조가 노무관리권을 가진 이상 안전관리 책임도 지는 게 순리다. 이에 대해 항운노련 관계자는 “노무권을 가졌지만 (하청업체는) 사용자가 지정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택항 사고도 개별 회사가 있는 입장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직접적인 교육 대상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항운노조가 채용한 사람이 아닌, 하청업체 직원이어서 노조로선 관리하기 힘들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노조 전임자, 산업안전 활동은 미미.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노조 전임자, 산업안전 활동은 미미.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안전 문제를 두고 원·하청, 사용자 종속 여부를 따지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노조의 전향적 자세가 아쉽다”고 말했다.

항운노조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항만운송사업법에 안전교육 조항조차 없어 이를 바로잡았다. 최근 청와대 일자리수석실과 간담회에서도 협력업체에 대한 안전조치를 요청했다. 5~7월 전국 항만에서 특별안전점검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노사정 모두 “평소 노조가 원·하청을 가리지 않고 안전문제를 다뤘으면 이처럼 사고가 잦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건설현장이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 조합원만 쓰라”며 노·노 다툼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회사는 어쩔 수 없이 노조와 협의해 인력을 충원한다. 사실상 건설 부문의 노무관리권도 노조가 가진 꼴이다. 그러나 노조의 안전관리 광경은 찾아보기 힘들다. 건설사 관계자는 “사고가 나면 노조가 규탄 집회를 하며 재등장한다”고 말했다.

5개 중 1개 사업장은 아예 산업안전 관련 노사 협의조차 없어.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5개 중 1개 사업장은 아예 산업안전 관련 노사 협의조차 없어.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팀이 노조 전임자의 활동시간을 분석했더니 임금·단체협상에 몰두하는 경향을 발견했다. 관련 시간은 갈수록 늘어났다.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에 할애되는 시간이다. 이에 비해 산업 안전 활동은 미미하다. 2013년에는 전체 활동시간의 9.3%에 불과했고, 김용균씨 사망 이듬해인 2019년에도 11.7%에 그쳤다. 조 교수는 “산재 사고가 발생하면 노사 어느 일방에 책임이 추궁되고, 예방보다는 사회적 비난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고 꼬집었다.

사업장에선 노사 간 안전 협의마저 등한시한다. 정부 조사 결과 5곳 중 한 개 사업장은 산업안전보건위원회조차 꾸리지 않았다.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이 위촉된 건설현장은 0.9%에 불과했다. 명예감독관은 자체 안전점검과 고용부 근로감독관이 벌이는 사업장 감독에 참여한다. 근로감독관 집무규정에 명시된 직책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자율적 관리·감독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보여주는 통계”라고 말했다.

근로자발 산업안전 관리·감독 사각지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근로자발 산업안전 관리·감독 사각지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근로자의 안전불감증도 복병이다. 산업안전보건법과 안전보건규칙에 명시된 근로자의 안전의무 조항은 53개에 이른다. 보호구 착용, 관리자의 지시 복종, 건강진단 거부 금지 등 다양하다. 산업현장에선 이를 어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건물 진단업을 하는 박모(62)씨는 “안전장비를 다 챙겨주고 교육도 하지만 음주 작업 등 곳곳에서 부주의 사례가 발견된다”며 “안전 지시를 어기는 근로자에겐 해고를 포함해 강력한 징계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고로 회사가 망하면 나머지 근로자의 생계마저 위협받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용부의 눈치 보기도 심각하다. 근로자가 안전 규정을 어기면 과태료 처분을 한다. 5만원에서 최고 300만원에 이른다. 고용부 고위 관계자는 “과태료를 부과하려 들면 ‘위력 민원’이 발생해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3년 근로감독관이 건설현장에서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은 근로자에게 과태료를 부과하자 폭행사태가 발생했다. 과태료를 부과해도 근로자가 반발해 납부하지 않으면 결손 처리된다.

한 근로감독관은 “일일이 부과했다가 결손금이 불어나면 결국 행정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눈 감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근로자에 대한 과태료 부과가 갈수록 감소하는 이유다. 고용부 고위 관계자는 “심지어 건설현장에 안전 규정을 세 번 어기면 퇴출하는 삼진아웃제가 도입됐지만 유명무실해졌다”며 한숨을 쉬었다. 근로자가 지켜야 할 법규는 있는데 관리·감독은 없는 셈이다.

이 때문에 선진국처럼 부과액을 올리고 벌금 등 형사처벌 수준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영국과 일본은 근로자가 안전수칙을 어기면 과태료 같은 행정처분 대신 벌금형에 처한다. 호주는 근로자가 의도적으로 혹은 무모하게 안전·보건 관련 작업을 방해하거나 제공되는 안전장비를 제대로 쓰지 않으면 최고 2억5500만원(1800 페널티 유닛)의 벌과금을 매긴다.

박두용 산업안전공단 이사장은 “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현장에 있는 노조와 근로자의 역할이 중요하고, 그에 따른 책임 분담이 필요하다”며 “사고가 난 뒤에야 노조가 나서는 풍경이 반복되는 것은 안전사고 예방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한은화·강기헌 기자, 울산=백경서 기자, 여수=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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