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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깃집 화장실이 구세주"…99.7km 최장 광역버스 타보니[영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9711번 버스 기사들은 주로 이용하는 회차 지점 근처의 한 고깃집 지하 화장실. 최은경 기자

9711번 버스 기사들은 주로 이용하는 회차 지점 근처의 한 고깃집 지하 화장실. 최은경 기자

99.7㎞ 최장거리 광역버스 9711번 타보니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지난달 31일 오전 10시 20분쯤 서울 마포농수산물시장 옆길. 9711번 광역버스 기사 박상욱(44)씨가 급히 비상등을 켜고 차를 댄 뒤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간 곳은 시장 건물 내 화장실. 그는 3분 뒤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 제2전시장 주차장을 출발한 지 1시간 30분 정도 지났을 때 일이다.

9711번 버스는 고양에서 양재동을 돌아 다시 고양으로 간다. 운행거리가 99.7㎞로 서울을 다니는 장거리 노선 버스 중 가장 길다. 차가 거의 없는 새벽에는 4시간에서 막힐 때는 6시간 정도 걸린다. 박씨는 “강변북로를 타면 중간에 차를 세울 수가 없어 현황판을 보고 막힐 것 같으면 미리 화장실에 다녀와야 한다”며 “오늘은 승객이 많지 않아 양해를 구했지만 출퇴근 시간에는 참고 갈 때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16일 서울 시내버스 742번(은평구 구산동↔교대역) 기사가 청와대 국민청원에 ‘저는 서울 시내버스 운전기사입니다!’라는 글을 올리면서 장거리 노선 버스 기사들의 ‘화장실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글은 서울시 정책으로 운행구간이 길어져 화장실에 가는 기본권과 휴게시간 등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장거리 노선은 운행거리가 60㎞ 이상이거나 운행시간이 240분(4시간) 이상인 노선을 말한다. 서울시는 서초구와 함께 서초동 서리풀 문화광장 앞에 신규 정류소와 버스베이(정차 공간)를 만들어 지난 11일부터 광장 공공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배차 간격을 조정하고 운행 횟수도 줄였다. 하지만 다른 장거리 노선 기사들은 여전히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 양재동을 오가는 광역버스 9711번이 서울 마포농수산물시장 옆 길에 비상 정차돼 있다. 최은경 기자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 양재동을 오가는 광역버스 9711번이 서울 마포농수산물시장 옆 길에 비상 정차돼 있다. 최은경 기자

국민청원 후 742번 버스 대책 마련했지만  

박씨 같은 9711번 버스 기사들은 양재동 회차 지점에서 내리면 곧장 가는 곳이 있다고 한다. 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진 한 고깃집 지하 화장실이다. 박씨는 “여기가 구세주다. 주변 카페 화장실도 가봤지만 비밀번호가 너무 자주 바뀐다. 이곳은 늘 개방돼 있어 지정 화장실처럼 찾곤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고깃집 관계자는 “특별히 버스회사와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문이 열려 있으니 기사분들이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승객이 기다리고 있거나 바쁜 시간이면 이곳도 가기 어렵다는 게 박씨 말이다. 박씨는 “부끄럽지만 때를 놓쳐 노상방뇨를 하거나 성인용 기저귀를 착용하는 기사들도 있다”고 털어놨다. 동료들 간에는 “이 노선을 15년 넘게 하면 방광이 망가져 병원에 다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왕복 4시간 넘게 운행하는 다른 광역버스 노선 기사들도 화장실 이용에 대한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다. 한 기사는 “회차 지점에서 화장실에 다녀오지 못하면 종점에 도착했을 때 다리가 저려 일어나기가 힘들다”고 했다. 한 742번 버스 기사는 “손님들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할 때는 다소 민망하다”고 했다. 이날 9711번에서 만난 승객 양천수(68)씨는 “생리현상인데 기다려야 하지 않겠느냐. 열악한 기사들 근무 여건을 파악해 개선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노선 15년 이상 하면 병원 가야”

오전 11시 30분쯤 회차 지점에 도착한 박씨는 고깃집 화장실에 다녀와 곧바로 고양으로 방향을 틀었다. 배차 시간을 맞춰야 해 휴식을 취할 틈이 없다. 박씨는 “이날은 평소보다 시간이 덜 걸렸다”며 “보통 5시간 넘게 쉬지 않고 운전한다”고 했다.

서울 서초구가 장거리 노선 742번 기사의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해 서리풀문화광장 앞에 마련한 정차 공간. [사진 서초구]

서울 서초구가 장거리 노선 742번 기사의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해 서리풀문화광장 앞에 마련한 정차 공간. [사진 서초구]

기사들은 “화장실 확보 문제도 있지만 더 근본적 문제는 빠듯한 운행시간”이라고 입을 모았다. 광역버스 9408번 기사 A씨는 “분당에서 영등포까지 왕복 4시간 30분이 넘게 걸리는데 그 먼 거리를 정해진 시간에 다녀오려면 여유 시간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밥은 거의 마시는 수준이고 신호는 지켜도 자동차 레이스 하듯 달리니 사고 위험이 늘 깔려 있다. 어떨 때는 미친 짓 같다”고 말했다. 452번 간선버스 기사 B씨도 “4~5시간 운전하면서 휴식시간이 없어 회차 지점에서 급히 화장실만 갔다 바로 출발한다”고 말했다.

빠듯한 운행이 근본적 문제 “거의 레이스”

서울시는 시민 안전과 기사 근로 여건을 이유로 2017년부터 장거리 노선 32개 중 이용 승객이 많은 5개를 제외한 27개 노선의 개선 작업에 들어갔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제까지 140·163·351번 등 10개 노선을 단축·분할했으며 올해 하반기 5개 노선을 추가로 개선할 계획이다. 하지만 일부 노선은 단축했음에도 여전히 장거리 노선인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의회 교통위원회 소속 성중기 의원(국민의힘·강남1)을 통해 입수한 2016년 말과 올해 5월 14일 장거리 노선 현황에 따르면 5년 동안 장거리 노선 수는 32개에서 25개(광역버스 제외)로 7개 줄었다. 462(현 452)·706(현 773)·703(현 774)번은 운행 거리와 시간은 줄었지만, 여전히 장거리 노선에 포함된다. 774번은 운행시간이 215분에서 210분으로 5분밖에 줄지 않았다. 도로 상황 변화로 장거리 노선의 운행시간은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게 성 의원의 지적이다. 108번은 운행 거리가 그대로지만 운행시간은 210분에서 260분으로 늘었다. 게다가 광역버스는 원래 긴 노선이라는 이유로 개선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사각지대로 남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울시 버스 장거리 노선 현황. 운행거리 60km 이상이거나 운행시간 240분(4시간) 이상.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서울시 버스 장거리 노선 현황. 운행거리 60km 이상이거나 운행시간 240분(4시간) 이상.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단축해도 장거리”…광역버스는 사각지대 

서울시는 742번 버스는 시가 정책적으로 운행 구간을 바꾼 사례라 직접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다른 노선은 버스회사가 할 일이지 일일이 들여다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버스를 중간에 갈아타게 하면 시민 민원이 발생해 어려움이 있다”며 “장거리 노선을 지속해서 조정하고 있지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강경우 한양대 교통물류공학과 교수는 “버스 기사의 근로 환경이 시민 안전과 직결되는 만큼 준공영제를 시행하는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광역버스를 개선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도 맞지 않는 행정”이라고 말했다.

최은경 기자 choi.eunk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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