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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우리는 그렇게 잊혀져 간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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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유자효 시인

유자효 시인

눈 내리는 겨울밤, 곁에서 잠자던 아내가 소리 없이 일어나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 어디론가 가는 것으로 이 영화는 시작됩니다. 아내는 치매를 앓고 있습니다. 엄마가 사라졌다는 전갈을 받은 아들과 딸이 아버지를 찾아옵니다. 엄마는 소녀 시절에 살던 곳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기억력이 어린 때로 퇴화한 것입니다. 간신히 찾은 엄마를 두고 자녀들은 안전한 보호를 위해 요양원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전 참전 용사이기도 한 아버지는 “네 엄마는 60년을 함께 산 내가 가장 잘 안다”며 거절합니다. 이 아버지도 심장병을 앓고 있습니다. 엄마의 병은 더 심해져 조금만 감시가 소홀하면 불시에 사라져서 수시로 비상이 걸리지요.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흰 머리칼을 직접 염색도 해주며 지극 정성으로 보살핍니다. 가정 문제로 속 썩는 딸에게 아버지는 말합니다. “우리는 문제가 없었는 줄 아니? 사랑은 헌신이야.”

치매 환자 다룬 영화 잇따라 출시 #누구나 신체·정신적 장애 겪게 돼 #노인문제 제도 갖추고 대비해야

잠든 아내 곁에서 심장 발작이 일어나자 남편은 홀로 밖에 나와 구급 전화를 하곤 숨을 거둡니다. 아들과 딸의 손에 끌려 장례식에 참석한 아내는 남편이 죽은 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이혼한 딸을 따라 LA에 온 어머니가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으로 끝납니다. 가족들이 서로에게 상처가 될 말들을 토해내며 부딪치는 “지금이 가장 완벽한 때”라는 대사가 아프게 남습니다. 지난 2019년 개봉한 미국 영화 ‘왓 데이 해드(What they had)’입니다.

안소니는 치매를 앓고 있습니다. 외동딸 앤으로부터 연인이 있는 프랑스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자신은 건강하다며 살던 집에서 지낼 것을 고집하지만 물건 둔 곳을 잊어버리고, 요양사를 의심해 내쫓기도 합니다.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딸과 10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낯선 여자가 와서 앤이라고 주장해 안소니를 혼란과 공포에 빠뜨립니다. 앤의 남편이라는 남자로부터 “언제까지 이렇게 모두를 불편하게 할 것이냐?”며 폭행도 당합니다. 어느 날 안소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요양원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간호사의 품에 안겨 아기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이 영화는 끝납니다. 안소니 홉킨스에게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더 파더(The father)’지요. 수상 소식을 들은 홉킨스는 생전에 치매로 고생했던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딜런 토머스의 시를 읊었습니다.

“아버지, 고이 잠들지 마세요./노년에는 날이 저물수록 더욱 불태우고 몸부림쳐야 하니/꺼져가는 빛을 향해 분노하고 분노하십시오”

섬세한 연출이 감동을 더해줍니다. ‘왓 데이 해드’는 치매 환자를 외부에서 보는 시선이고, ‘더 파더’는 치매 환자의 입장에서 보는 시선입니다.

선친은 쉰여섯 살에 홀로 되셨습니다. 그 후 세상 뜨기까지의 16년, 그 고독의 깊이를 저는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합니다. 밤에 아버지의 방을 들여다보면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계셨습니다. 잠 못 이루는 긴 밤을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버지는 나중에는 아들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출근을 앞두고 아버지를 목욕시켜야 할 상황이 돼서 옷을 벗기고 있는데 인터폰이 왔습니다. 이중 주차된 제 차를 치워달라는 연락이었습니다. 급히 내려가 차를 치우고 달려와 보니 그동안에 아버지는 욕조에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는 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빨갛게 덴 아버지를 안아 올리며 절망감에 소리쳐 울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위눌리는 아픔입니다.

지금은 장모님이 요양병원에 계십니다. 제 아들을 키워주신 장모님은 예순두 살에 홀로 되셔서 서예를 하며 꿋꿋이 견뎠습니다. 그러나 80대 중반에 접어들어 인지장애가 오게 됐지요. 자녀 집에 계시다가 배회 증상이 심해져 주간 보호센터를 이용했고, 매일 차를 타는 것도 힘들어져 요양원으로 옮겼습니다. 낙상사고를 우려한 요양보호사가 휠체어에 결박을 하자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 위급해져서 외손자가 있는 병원에서 회복한 뒤 생애 마지막 이사라고 하는 요양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요즘은 코로나19로 면회도 힘든 상황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언젠가는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겪게 됩니다. 당신이 잊어갈 때, 잊혀져갈 때, 당신은 어떤 상황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개인은 거기에 대비해야 하고, 국가는 제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장수 시대, 우리 사회가 노인 문제에 보다 세심하게 대응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거대한 힘을 진심으로 맞는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유자효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