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진실 알게 된 기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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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을 해소시킨 사실상의 청문회였다."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이 1일 김병준 교육부총리 청문회가 끝난 뒤 그의 거취를 물은 데 대해 한 말이다. 오전 청문회 전만 해도 열린우리당과 총리실 쪽에서 기정사실화한 김 부총리의 경질을 이의 없이 받아들이던 청와대였다. 하지만 청문회가 끝나자 말이 달라졌다. 이병완 비서실장 주재로 열린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한 참석자는 "객관적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김 부총리의 의혹이 상당히 해소됐다는 취지였다.

청문회를 전후한 상황의 미묘한 변화를 빌미로 김 부총리를 그대로 끌고 가고 싶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간절한 바람이 정 대변인의 말 속에 녹아 있다. 반발 여론이 사그라지고 상황이 반전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청와대는 김 부총리의 거취 문제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핵심 관계자는 "(거취문제는) 결정된 게 없다"면서 "여론의 동향과 네티즌 반응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종 방안을 결정할 것"이라고만 했다.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은 "노 대통령은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채 여론이나 국민정서에 밀려 인사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지 않으냐"고 말했다. 유임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뉘앙스다. 임기를 1년8개월여 남긴 노 대통령이 이처럼 김 부총리에게 연연하는 것은 '인사권의 실패'가 권력누수(레임덕)의 문을 확 열어젖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2001년 8월, 역시 1년8개월의 임기를 남겨뒀던 김대중(DJ) 대통령은 당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자리를 지키는 데 실패하면서 급격한 권력누수를 맞았다. 임 장관의 해임건의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공동정권의 한 축인 자민련의 가세가 결정적이었다. DJ는 격분했고 DJP(김대중+김종필) 공동정권은 깨졌다.

DJ는 정면돌파 의지를 불살랐다. 하지만 인사권 행사에 타격을 받은 대통령은 시름시름 무력해져갔다. '반쪽 정권'은 국정 장악력에 한계를 보이며 휘청거렸다. 석 달 후인 11월, DJ는 급기야 민주당 총재직까지 내놔야 했다.

◆ 인사권 뺏기면 식물 대통령=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인사는 "대통령의 장관 임명권이 제약받는 상황은 사실상 '식물 대통령' 상태와 마찬가지"라고 회고했다. 대통령의 인사권에 구멍이 생기면 권력관리도, 국정운영도 온전히 끌고 가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DJ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까지 지낸 노 대통령은 DJ가 무력화되는 과정을 생생히 지켜봤다. 인사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권력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다.

노 대통령은 정권 출범 후 줄곧 코드 인사 논란에 시달렸지만 소신을 접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의 엄청난 반발에도 불구하고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을 강행했다. 김 부총리 임명도 밀어붙였다. 정국 돌파에 대한 자신감과 정면돌파로 승부를 거는 특유의 인사 스타일이다. 노 대통령은 평소 "국면전환용 개각은 하지 않겠다"는 말을 여러 번 해왔다.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과 윤광웅 국방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사태 때 이 원칙을 지켰다. 김 전 장관의 경우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됐는데도 노 대통령을 이를 거부했고, 결국 당사자가 자진 사퇴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래서 "이번에 또 김두관 전 장관의 경우가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을 환기하며 "밀려서 쓰러질지언정 넘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야당이 해임건의안을 제출하는 상황까지 감수해가며 정면돌파 수순을 밟게 될 것이란 얘기다.

노 대통령이 이런 결정을 내린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열린우리당과의 결별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임기 후반기로 접어드는 정치환경도 부담이다. 반대로 당의 의견을 따른다면 인사권의 실패로 급격한 무력화를 겪어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정민.김성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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