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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합의 계승한다?…文정부와 다른 바이든 행정부 속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싱가포르 선언에서 다시 시작해 보다 구체적 방안을 이루는 대화 협상을 해나가야 한다.”(문재인 대통령, 지난 1월 신년 기자회견)
“우리의 노력은 이전 정부에서 마련된 싱가포르 및 다른 합의 위에서 구축될 것이다”(커트 캠벨 미 백악관 NSC 인도태평양 조정관, 18일 연합뉴스 인터뷰)

한·미 모두 '싱가포르 합의' 의미부여 #文 "싱가포르 합의에서 다시 시작해야" #원론적 수준 '반쪽 합의' 평가도 #북·미 이견으로 결국 '하노이 노 딜'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싱가포르 합의(공동성명)’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동맹의 의견을 중시한다는 바이든 행정부가 새 대북정책에서 한국 정부가 원하는 대로 싱가포르 선언을 토대로 삼겠다는 뜻을 밝히면서다. 정부가 북핵 접근 등에서 한·미 간 '완전한 조율'을 강조하는 가운데 오는 2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이런 원칙을 다시 확인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싱가포르 합의 계승' 의미는?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센토사 섬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두 정상은 이날 회담을 통해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및 한반도 비핵화 노력 등의 내용이 담긴 싱가포르 선언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센토사 섬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두 정상은 이날 회담을 통해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및 한반도 비핵화 노력 등의 내용이 담긴 싱가포르 선언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싱가포르 합의와 관련한 바이든 행정부의 입장이 처음 드러난 건 지난 1일 워싱턴포스트(WP)가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바이든표 새 대북정책은 싱가포르 합의와 과거 다른 합의들을 기반으로 구축될 것”이라고 보도하면서부터다. 캠벨 조정관은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 18일 인터뷰에서도 이를 확인했다.

북핵 문제는 21일 한·미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이기도 하다. 정상회담 결과물이나 양 정상의 공동 기자회견 때 대북 접근과 관련해 싱가포르 합의가 언급될 수도 있다. 다만 바이든 행정부 대북정책의 구체적 내용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싱가포르 합의를 토대로 한다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북핵 협상에 관여한 알렉스 웡 전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부대표는 20일 미국의소리(VOA)에 “싱가포르 합의는 그 자체로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북한 비핵화를 위해 광범위한 핵심 사안에 대해 북한 스스로 협력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합의는 북한 지도자가 직접 비핵화를 서면으로 약속하고 서명까지 한 유일한 문서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향해 "스스로 한 비핵화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할 근거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쪽 합의' 둘러싼 북·미 아전인수

하지만 싱가포르 합의는 한계 또한 명확하다.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약속 ▲항구적이며 공고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노력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한 북한의 노력 약속 ▲미군 유해 발굴 및 송환 약속 등 4개 항이 전부다. 내용 자체가 원론적인 데다 비핵화의 대상이나 시기조차 명시되지 않아 '반쪽짜리 합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2018년 1차 정상회담 이후 약 8개월만에 다시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북미 정상은 핵시설 폐기와 대북제재 완화 등을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결국 2019년 북미 정상회담은 '하노이 노 딜'로 끝났다. [연합뉴스]

2018년 1차 정상회담 이후 약 8개월만에 다시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북미 정상은 핵시설 폐기와 대북제재 완화 등을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결국 2019년 북미 정상회담은 '하노이 노 딜'로 끝났다. [연합뉴스]

바이든 행정부가 싱가포르 합의를 토대로 한다면서도 꼭 '이전의 다른 합의들'을 함께 언급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는 이전 정부의 북핵 접근법이 모두 실패했다는 전제하에 자신들은 과거와 다른 새롭고 실용적 접근을 하겠다는 입장을 정했다. 싱가포르 합의를 토대로 한다는 게 이 중 유효한 부분만 차용하겠다는 것에 가깝지, 이를 온전히 계승하겠다는 것과는 다른 뜻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캠벨 조정관도 18일 인터뷰에서 "우리의 목표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다. 우리는 지난 4개 행정부의 노력이 이런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음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합의로도 비핵화라는 목표 달성에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당시에도 싱가포르 합의에 대한 북·미 간 해석 차이가 결국 대화 중단으로 이어졌다. 북한은 1항에서 관계 정상화를 규정한 만큼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 등을 통한 신뢰 구축 조치를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를 조건으로 대북 제재 완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제재는 북한의 의미 있는 비핵화 조치 전에는 풀 수 없다며 ‘영변 플러스 알파(+α)’를 요구했다. 또 비핵화의 최종목표에 합의하고, 전체 로드맵을 그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원칙을 유지했다.

"실없는 맹세에 의미부여" 비판도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와 관련, 바이든 행정부가 싱가포르 합의 외에 염두에 두는 과거의 합의에는 2005년 북핵 6자회담의 결과물로 도출된 9·19 공동성명이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9·19 공동성명은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목표로 명시했고, 폐기의 대상을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으로 규정했다. 이는 초기조치 합의문(2·13 합의, 2007년)과 2단계 조치 합의문(10·3 합의, 2007년)으로까지 이어졌는데, 10·3 합의는 '연말까지' 등의 표현으로 시한도 설정했다. 싱가포르 합의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실질적 내용을 담았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4개 항으로 구성된 싱가포르 합의는 역대 북·미 간 합의 중 가장 엉성하고 총론적인 수준의 합의에 불과하다”며 “싱가포르 합의는 결국 아무 성과 없이 ‘하노이 노딜’로 끝난 북·미 간의 실없는 맹세일 뿐이란 점을 잊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바이든 행정부가 '동맹 협력'이라는 관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한 싱가포르 합의를 계승하겠다는 원칙론적 입장을 밝힌 것으로 보일 뿐, 이같은 메시지에 의미부여를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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