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스승과 제자의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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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초대된 정창화(75) 감독이 9일 오후 부산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 뒤뜰에서 임권택(69) 감독과 만났다.

정감독은 1960년대 충무로에서 액션 영화의 최고봉으로 군림하다 홍콩의 쇼브라더스사(社)에 스카우트돼 미국과 유럽에까지 이름을 알렸다. 임감독은 56년부터 61년까지 정감독의 연출부에서 스태프로 참여하며 연출 수업을 받았다. 임감독도 '장군의 아들'등에서 액션영화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었다.

미국에 거주하다 회고전에 맞춰 귀국한 정감독은 "잊고 있었던 영화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며 말문을 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정리한다.

임권택=내가 유일하게 연출을 배웠던 분이 정감독이다. 정감독의 모습과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하다. 근황이 궁금하다.

정창화=캘리포니아 남단 샌디에이고의 소도시에서 조용히 보내고 있다. 한국과 홍콩에서 감독 생활을 하며 사람들에게 치인 것 같아 이곳을 택했다. 영화에 대한 향수와 과거의 추억 속에서 살아간다. 가끔 바다낚시나 골프도 즐긴다.

임=56년 정감독이 '장화홍련전'을 찍을 때 제작부 막내로 들어갔다. 정감독은 생김새는 부드러워 보여도 작품은 엄청나게 터프했다. 촬영 때 하도 꼼꼼하고 끈질겨 잔인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리허설을 몇번이나 거듭하면서 마음에 들어야 비로소 촬영에 들어갔다. 세트를 지을 때도 건성건성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정감독 아래서 훈련받은 게 이후 연출 생활에 큰 힘이 됐다.

정=임감독은 다른 스태프보다 유달리 부지런했다. 오전 4시에 통행금지가 해제될 땐데 5시면 사무실에 나와 준비를 하곤 했다.쓸 만한 청년이라고 생각해 58년 '비련의 섬'을 찍을 때 조감독으로 기용했다. 61년 임감독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보고 탁월한 역량이 엿보여 훗날 거목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홍콩에 건너간 건 그 무렵 한국 영화계가 너무 영세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무술감독과 스턴트맨도 쓰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특수효과 장치도 없어 총격 장면에선 실제 총을 사용했는데 유탄에 맞은 적도 있다. 다행히 왼쪽 가슴에 꽂은 대본에 박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홍콩에 가 보니 할리우드에 못잖은 규모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변변한 촬영소 하나 없었는데 말이다. 학창시절 중국어를 배운 것도 홍콩에서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됐다.

임='장군의 아들'에 정감독의 흔적이 많다고 얘기하는 데 사실이다. 그 문하에서 액션과 사극을 배웠기 때문에 내 영화의 뿌리가 정감독 영화에 닿아 있는 건 당연하다.

정=한국 영화가 많이 발전했다. 본인의 기량에 따라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는 환경이 된 만큼 젊은 감독들은 좁은 한국 시장만 바라볼 게 아니라 세계 시장을 겨냥한 영화를 만들어 주기 바란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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