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백신에 나뉜 유럽, ‘임상자료 부족’ 대 ‘백신 관광’ 모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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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백신 총력전에 나선 유럽이 러시아산 백신 사용을 놓고 엇갈린 대응을 내놓고 있다. 러시아가 유럽 내 백신 물량 부족 사태를 발판으로 각국과 독립적 계약을 추진하는 등 적극적인 백신 외교를 펼치면서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코로나19 백신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유럽 내 대립을 조장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산 코로나19 백신인 '스푸트니크 V'. [리아노보스티=연합뉴스]

러시아산 코로나19 백신인 '스푸트니크 V'. [리아노보스티=연합뉴스]

19일(현지시간) 리아노보스티 통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 국부 직접투자펀드(RDIF)는 “스푸트니크 V 백신을 두 차례 접종 완료한 러시아인들의 코로나19 감염률 분석 결과 백신 효과가 97.6%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마크롱 "러시아 백신 해결책 아니다" #독일, 스푸트니크V 자체 도입 추진

이에 따르면 RIDF가 지난해 12월 5일부터 올해 3월 31일까지 스푸트니크 V 백신을 2회 접종한 380만 명을 분석한 결과 1차 접종 후 35일 뒤의 감염률이 0.027%였다. 반면 같은 기간 백신 비 접종자의 감염률은 1.1%로 높았다. 이번 결과는 지난 2월 초 국제 의학 학술지 ‘랜싯’을 통해 발표한 예방 효과 91.6%보다 높은 수치다.

EU "평가 아직 일러" vs "이미 승인"

RIDF의 이번 발표는 유럽의약품청(EMA)이 스푸트니크V를 심사 중인 상황에서 나왔다. 특히 최근 얀센 백신이 혈전증 논란으로 접종이 보류되면서 유럽 내 백신 물량이 부족한 상황인 만큼 러시아 백신 검토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U 회원국 사이에서 러시아산 백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타스 통신에 따르면 티에리 브르통 EU 내부시장 담당 집행위원은 최근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와 인터뷰에서 “스푸트니크V 임상 자료가 부족해서 평가 과정이 더 오래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생산 능력도 별도로 평가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올해 말까지 유럽에서 스푸트니크V가 사용될 가능성은 작다”고 전망했다.

티에리 브루통 EU 내부시장 담당 집행 위원. [EPA=연합뉴스]

티에리 브루통 EU 내부시장 담당 집행 위원. [EPA=연합뉴스]

전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CBS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EU 회원국이 백신 접종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스푸트니크V 백신을 사용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고 말했다. EMA 등 EU 내 기관의 승인없이는 러시아산 백신을 사용할 수 없다면서 “러시아 백신이 유럽 내 백신 공급의 해결책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반면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이미 러시아산 백신을 도입했다. 현재 스푸트니크V 사용을 승인한 국가는 60여 개국에 이른다. EU 회원국에서는 헝가리가 최초로 스푸트니크V 긴급 사용을 승인하고 접종을 시작한 데 이어 슬로바키아도 이 백신 200만회 분을 들여왔다. 독일은 EU와는 별도로 스푸트니크V 백신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급기야 일부 유럽인들은 러시아로 백신 관광을 떠나고 있다. 유로 뉴스에 따르면 독일과 오스트리아, 노르웨이의 여행사들은 러시아 모스크바 관광과 백신 접종을 결합한 패키지 관광 상품을 내놨다. 유럽이 백신 부족으로 접종이 지연되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유로 뉴스는 전했다.

"러시아, 백신 내세워 경쟁 조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

이처럼 유럽에서 러시아산 백신 도입을 놓고 제각각 다른 행보를 보이자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백신을 이용해 유럽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영국 BBC에 따르면 피에르 비몬트 전 프랑스 EU대사는 “유럽이 제각각 백신 확보에 나선 것에 푸틴 정부는 기뻐하고 있을 것”라며 “(러시아에) 속아서는 안 된다. 러시아와 중국 백신 사용은 EU 회원국 간 경쟁을 부추길 뿐”이라고 전했다. 일부 유럽 국가 외교관들 역시 CNN에 “러시아 백신이 EU 회원국과 동맹을 분열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러시아의 속셈을 파악한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 간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BBC는 “그동안 해킹과 가짜뉴스를 이용해 유럽 내 불협화음을 조장했던 러시아는 최근 코로나19 백신을 이용해 아무런 노력 없이 비슷한 성취를 일궈내고 있다”면서 “러시아가 스푸트니크V 백신을 소프트파워로 이용해 유럽을 압박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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