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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터 나무막대 6개의 은밀한 비밀···23억짜리 문화재 CSI 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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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내에 개관한 문화재분석정보센터 고DNA분석실에서 연구원들이 인골 조사를 하는 모습.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지난 15일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내에 개관한 문화재분석정보센터 고DNA분석실에서 연구원들이 인골 조사를 하는 모습.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라고 하면 주거지‧고분 발굴 때 나오는 그릇‧복식 등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 현장에선 작은 기와 파편, 하찮은 나뭇조각까지 허투루 볼 일이 아니다. 예컨대 2003년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발견된 길이 26~30cm의 나무막대 6점이 그랬다. 애초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사팀은 이곳을 곡물창고로 여겼고 막대 역시 측정을 위한 자(尺)로 생각했다. 이듬해 토양 분석 결과 다량의 기생충 알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백제인의 화장실이었음이 밝혀졌다. 막대의 용도 역시 볼일 본 뒤 뒤처리하는 도구로 추정됐다. 고고학적 막대기와 토양 및 생물학 분석이 만나 국내 첫 고대 화장실 유적이 확인된 사례다.

23억짜리 AMS 갖춘 문화재분석정보센터 #뼈·토기·목재 등 각종 시료들 원스톱 관리

“사람‧동물의 뼈, 실낱같은 직물 조각, 음식물 찌꺼기도 모두 옛사람과 삶과 문화를 엿보게 하는 귀한 자료다. 이번 센터 개설을 통해 이 같은 시료들을 한자리에 모아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고 정확한 연대측정을 할 기반이 마련됐다.”

지난 15일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내에 개관한 문화재분석정보센터 1층 가속질량분석기(AMS) 연대측정실에서 목재 연대측정 전처리 준비작업이 시연되고 있다.[연합뉴스]

지난 15일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내에 개관한 문화재분석정보센터 1층 가속질량분석기(AMS) 연대측정실에서 목재 연대측정 전처리 준비작업이 시연되고 있다.[연합뉴스]

문화재분석정보센터 X선분석실에서 연구원이 자외선분석기로 대형 불화의 안료성분 분석을 시연하고 있다. [뉴스1]

문화재분석정보센터 X선분석실에서 연구원이 자외선분석기로 대형 불화의 안료성분 분석을 시연하고 있다. [뉴스1]

지난 15일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안에 공식 개관한 문화재분석정보센터(이하 센터)의 신지영 학예연구관의 설명이다. 2013년 추진 이래 8년 만에 개관한 센터는 국내 문화재 연구기관으로는 처음으로 문화재 시료의 전처리, 분석과 보관, DB 구축까지 연대측정의 모든 주기를 ‘원스톱’으로 관리하게 된다. 말하자면 문화재 분석의 과학수사대(CSI) 같은 역할을 맡게 되는 것. 190억원을 들인 건물(지하 1층~지상 5층)엔 연대측정 실험실, 질량분석실, 분석시료 보관실 등을 갖췄다. 오는 8월엔 문화재 방사성탄소연대측정용 가속질량분석기(AMS)가 들어온다. 장비 한 대 값이 23억원에 이르는, 문화재청 보유 설비 중에 가장 고가의 최첨단 장비다. 그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10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문화재 분야 AMS를 갖춘 국가기관이 없다는 오명도 벗게 됐다.

“고고학자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게 ‘우리가 파낸 게 언제 것이냐’ 즉 연대측정이다. 이전까진 국내 AMS가 희소하고 다룰 수 있는 전문가도 부족해 미국‧일본 민간회사에 시료를 보냈는데, 이젠 센터 내 처리로 일종의 문화재 데이터 주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신 연구관)

특히 인골을 포함한 각종 뼈의 탄소 동위원소 분석이 정밀해져 연대 측정 정확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흥수 아이’ 같은 혼란을 덜 수 있다. 흥수 아이는 1982년 충북 청원군 가덕면에서 발굴된 ‘한국 최고(最古)의 구석기인 화석’. 교과서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유골이지만 발굴 당시 보존처리 과정의 오염으로 인해 현재는 4만년 전 화석이란 데 의문이 제기된 상황이다. 신 연구관은 “이 같은 점을 인지하고 향후 발굴과정에서 뼈나 목곽묘가 출토되면 센터가 수습, 정제, 분석하는 과정을 주도함으로써 더 온전한 상태로 시료를 보관‧활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골 발굴 조사 과정 모습.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인골 발굴 조사 과정 모습.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뼈나 치아 분석은 식습관 및 식재료 분석에도 중요한 의미를 띤다. 예컨대 2010년 발굴된 우리나라 최대 신석기 무덤인 부산 가덕도 장항 유적에선 서로 다른 48명의 사람뼈가 나왔는데 이 중 10명 뼈의 안정동위원소를 분석한 결과 주로 해양성 포유류와 어패류를 먹은 것으로 나타났다. 생존 당시 인체 단백질이 비교적 많이 보존된 미라의 경우엔 정보가 훨씬 풍부하다. 2012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경북 문경 흥덕동 회곽묘에서 출토된 조선시대 여성 미라(진성이냥묘)의 머리카락 등을 분석했더니 주인공이 죽기 직전에 육류를 많이 먹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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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인골ㆍ미라 등은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매장법)에 명시된 문화재가 아니라서 그간 처리‧보존에 소극적이었고 관련 DB 구축도 전무하다. 최근 문화재청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한 ‘오산 구성이씨‧여흥이씨 묘 출토복식(총 96건 124점)’의 경우 복식만 벗겨낸 두 미라가 발굴 11년째 고려대 구로병원 부검실에 방치된 상황. 16세기 임진왜란 이전에 살아서 ‘임진왜란 마님’들로 불리는 이들 미라를 센터가 인수‧관리하기엔 관련 시설‧전문가는 물론 법적 근거도 없다. 서민석 학예연구관은 “미라의 경우엔 법적 뒷받침이 되면 외부 병원을 거점 연구기관으로 선정해 협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조승래 의원실이 이 같은 문화재 이외 학술적 중요자료(중요출토자료) 처리와 관련된 법률개정안을 상반기 발의 목표로 추진 중이다.

최근 보존과학 투자가 늘면서 국립중앙박물관도 2024년 완공 목표로 문화유산과학센터를 추진 중이다. 기능이 일부 겹칠 수 있다는 지적에 지병목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박물관 측은 소장유물 40만점을 우선적으로 관리하겠지만 우리 센터는 국내 출토 유적의 일차적 처리 뿐 아니라 해외 연계 활동을 통해 연구 지평을 넓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센터 측은 내년 중으로 광발광연대측정기까지 들여오고 이들을 운용할 전문인력 확충을 통해 ‘문화재 분석 허브’로 거듭난다는 구상이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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