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수사기관 ´한건주의´식 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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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불안하다. 올 들어 유난히도 식품의 위해성 논란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품 파동이 대부분 지나치게 부풀려져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정부의 미숙한 대응과 언론의 과잉 보도도 한몫했다. 수입식품 파동이 반복되는 이유를 점검했다.

◆ 수입식품의 급격한 증가=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 이후 식품 수입 물량이 급증했다. 특히 2000년 이후 국산식품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최근까지 6년 새 수입식품 검사 건수가 2.3배나 증가했다.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이 매일 섭취하는 칼로리의 70%, 가공식품 원료의 80%를 수입식품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과거에는 미국.유럽 등의 식품이 수입됐지만 2000년 이후엔 위생 상태는 떨어지지만 값이 싼 중국.베트남 등에서 반입되는 물량이 크게 늘어났다"고 말했다. 지난해 중국산 식품은 전체 수입 농산물의 15.7%, 수산물의 38.3%를 차지했다.

◆ 허술한 국내 검역 시스템=수입식품 검사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7월까지 수입된 중국산 김치의 55%인 3만168t이 평택항으로 들어왔지만 검사 인력은 한 명뿐이다. 1인당 하루 검사 건수가 9건으로 적정 건수(4, 5건)를 초과했다.

검사의 효율성도 떨어진다. 미국의 식품의약국(FDA).농무부(USDA)는 수출국별로 몇몇 유해 물질을 선정한 뒤 이를 집중적으로 검사한다. 수십 년간 쌓아온 자료(유해 물질 검사 결과), 수출 국가의 현재 위생 상태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 숙련된 검사 인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서울대 수의대 이영순(전 식의약청장) 교수는 "수입식품의 정밀검사율이 한국은 20%, 미국은 5%이지만 부적격 식품 적발률은 미국이 3~4%로 오히려 한국(0.5% 이하)보다 높다"고 말했다.

◆ 해외 정보 부족=선진국에 비해 정보 수집력이 떨어지고, 기본적인 정보를 활용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식품위생 컨설턴트인 강영재 박사는 "김치의 기생충 알 검출 파동은 중국에 대한 기본 정보(일부 농장에서 인분을 퇴비로 사용, 중국인의 회충 감염률 10% 이상 등)를 검사에 반영하지 않아 일어난 일"이라고 지적했다.

◆ 정부 기관 간 협력 부재=말라카이트 그린 파동이 단적인 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이 물질을 식용 어류에 써선 안 되는 물질로 규정했는데 해양수산부는 거꾸로 양식 어민에게 사용하도록 권장했다. 중앙대 식품공학과 하상도 교수는 "미국은 FDA.USDA로 식품위생 관리 업무가 이원화돼 있지만 상호 협력.정보 교환으로 미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다"며 "관리체계 일원화만이 능사가 아니며 다원화된 체제를 유지하면서 부서 간 협력을 외면하는 공무원.기관에 분명한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한건주의 발표=검찰.경찰.식의약청.국회의원.시민단체 등이 충분한 유해성 검토 없이 성급하게 발표하는 것도 파동이 잦은 요인이다. 언론의 무비판적인 전달 태도도 문제다. 중국산 김치에 납이 함유됐다고 문제를 제기한 한나라당 고경화 의원은 "이번에 검출된 중국산 김치의 납 농도가 인체에 유해한 수준인지는 잘 모른다"며 "우리 발표로 국민 다소비 식품인 김치에 납의 규제 기준을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납의 규제 기준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같은 충격요법을 쓰기보다 식의약청에 다른 방법으로 요구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검출됐다는 정부의 발표에 대해서도 충북대 의대 엄기선(기생충학) 교수는 "기생충 알이 묻은 식품을 먹더라도 쉽게 기생충에 감염되는 것은 아니다"며 "충분한 검토 없는 성급한 결론으로 소비자의 불안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이영순 교수는 "일본은 2003년 7월 내각부 산하에 식품안전위원회를 만들어 식품의 위해성 평가와 정보의 공개를 일임하고 있다"며 "이는 철저한 검증 없는 정부 발표로 인한 식품 파동을 예방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라고 소개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김치를 수입하는 일본의 대응 방식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 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중국산 김치에 대해 기생충 알 전면 검사를 시작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며 "중국의 반발을 의식해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 과민한 소비자=신구대 식품영양과 서현창(식품미생물학) 교수는 "유해 물질을 pg(1조 분의 1g)까지 검출할 수 있는 현실에서, 유해 물질은 극소량도 '검출'돼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유해 물질의 유무보다 양을 따져야 하고, 담배 1개비의 유해성에 미치지 않는 극소량의 유해 물질엔 과민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미국 FDA의 전문가들은 식품 안전을 가장 위협하는 물질로 식중독균.경구 전염병균 등 세균(전체 식품 관련 질환 발생 원인의 90%)을 꼽는다. 반면 우리 소비자는 전체 식품 관련 질환 발생 원인의 3%에 불과한 잔류 농약.중금속.환경호르몬 등 유해 화학물질을 훨씬 두려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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