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희 기자의 맛 따라기] 추어탕 한 그릇, 가을빛 한아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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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외로 조금만 나가도 들판엔 이미 가을빛이 깊다. 가을걷이도 한창이다. 어떤 논엔 누렇게 익은 벼가 이삭을 훈장처럼 치렁대고 있고, 일찍 벼를 벤 논은 포기마다 움순이 한 뼘쯤 자라 모내기를 새로 한 듯 논바닥이 푸릇푸릇하다. 추수가 바로 끝난 논엔 한 생애의 결실들을 남김없이 사람들에게 털어 준 벼들이 나란히 누워 흐뭇한 휴식에 젖어 있다. 조각조각 잘 이은 조각보 같은 그 들판 너머, 눈 시린 창공에 어릴 적 가을 추억이 아른거린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고 했다. 매우 바쁘다는 말이다. 이 무렵 옛 농촌에서는 열 살 안팎의 아이들도 눈에 띄기만 하면 요긴한 일손이었다.

소년은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들길을 간다. 위 주둥이에 잔을 박고 그 위에 담은 간단한 안주 접시는 주전자 뚜껑으로 덮었다. 술을 따르는 주전자 귀때에는 쇠 젓가락 한 매가 꽂혀 있다. 주전자 하나로 암팡진 술상이 꾸려졌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들에 일하고 있는 농사 도우미(그땐 머슴이라 했다)에게 농주 새참을 내가는 길이다. 가는 도중 주전자 속이 궁금해진다. 호기심에 몇 모금, 막걸리 맛을 보기도 한다.

농사 도우미는 벼 베기를 앞두고 논에 물 빼는 일을 할 때도 있었다. 벼 포기를 뽑고 진흙을 긁어내 논 가장자리 둘레로 깊게 물길(갈개)을 낸다. 농주를 달게 마신 그는 갈개 치기를 계속하며 소년에게 빈 주전자를 들고 뒤따르게 한다.

벼 포기를 옮기거나 진흙을 두 손으로 걷어올릴 때마다 진흙덩이나 손가락 사이로 미꾸라지가 쑥쑥 삐져나온다. 겨울잠을 자기 위해 한껏 살이 올라 배가 노릇노릇하도록 기름지고 힘이 넘치는 놈들이다. 이내 주전자는 그득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소년의 걸음은 개선장군 부럽지 않았다.

추어탕의 계절 가을, 그런 추억 같은 맛의 추어탕 집을 '발굴'했다. 변변한 간판도 없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깊은 골목에 일부러 숨은 듯 들어앉은 '남도추어탕' 집은 경복궁 동편 길 건너, 조선시대 사간원이 있던 사간동 화랑가에 있다.

음식은 정통 전라도식 남도추어탕 한 가지뿐이다. 삶아서 간 미꾸라지 살과 제 국물에 된장, 들깨 즙, 다진 마늘, 통고추, 묵은 시래기를 넣고 걸쭉하게 끓이는 방식이다. 말린 시래기가 푹 물러 씹지 않고도 부드럽게 넘어가도록 끓인다.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뒀다가 뚝배기에 1인분씩 덜어 다시 끓인 뒤 부추를 한 줌 넣어 상에 낸다. 전남 벌교 출신인 주인 아주머니의 추어탕 맛은 다른 음식점에서 배운 게 아니라 친정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래서 세련된 맛이라기보다 토속적인 깊이와 구수함이 가득하다. 젓갈 무침, 무말랭이 무침, 갓김치, 깍두기, 양파 초절임, 깻잎 장아찌 등 대여섯 가지 밑반찬들도 저마다 빠지지 않는 맛을 갖췄다. 전라도 사람들이 즐겨 쓰는 '개미가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모녀 둘이 좁은 살림집에서 손님을 맞는다. 그래서 맛은 변함없지만 손님을 많이 받지 못한다. 흠이라면 흠이다. 점심시간 최대 수용인원 40~50명. 주인 아주머니는 손님 많으면 감당 못한다고, 기사 쓰지 말라고 취재하는 내내 조바심을 친다. 손님이 몰리지 않는 시간을 잘 가려 가시길.

남도추어탕

위치:서울 종로구 사간동 삼청동길 초입. 금호미술관(폴란드대사관) 지나 국군 서울지구병원 직전 오른쪽 골목 안 '비나리' 맞은편.

전화:02-730-3050

메뉴:추어탕(7000원), 찬바람 도는 계절엔 벌교 꼬막과 주꾸미

영업시간:오전 11시30분~오후 9시

쉬는 날: 일요일

좌석 수: 최대 28석(예약 필수)

신용카드.주차:안 됨

2005.09.22 15:57 입력 / 2005.09.23 06:5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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