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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정의용 장관의 위험한 줄타기 외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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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토니 블링컨 미 국무 장관이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 외교 국방 장관회의에 앞서 기념촬영을 마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2021.3.18. 사진공동취재단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토니 블링컨 미 국무 장관이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 외교 국방 장관회의에 앞서 기념촬영을 마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2021.3.18. 사진공동취재단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2일 중국을 방문해 왕이 외교부장과 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연다. 역대 외교부 장관은 대부분 취임 후 미국 방문을 고위급 외교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전임 강경화 장관과 그 전임 윤병세 장관도 모두 취임 한 달 만에 미국을 방문했었다. 그런데 정 장관만 지난 2월 취임 이후 첫 해외 대면 외교 일정을 중국행으로 잡은 것이다. 현 정부의 장관급 고관들이 코로나로 해외 방문을 자제 중인 현실을 고려하면 정 장관은 중국을 유난히 각별히 챙긴다는 지적을 받기에 충분하다.

한·미·일 회의 맞춰 보란 듯이 중국행 #한·미 동맹 토대의 ‘원칙 외교’ 절실

한·중 외교장관 회담은 날짜도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2일)와 겹친다.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는 미·중 갈등 속에서 북·중이 구축한 반미 연대를 깨기 위한 공동의 전략 도출이 핵심이다. 장소도 미국 메릴랜드주 해군사관학교로 정해 한·미·일 협력을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하려는 취지를 분명히 했다.

그런데 한국 외교부 수장은 하필 이 시점에 전용기로 중국에 날아가 ‘긴밀한 한·중 관계’를 과시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중국이 정 장관을 초청한 장소도 미·중 간에 전운이 감도는 대만 코앞의 푸젠성 샤먼이다. 미·중 경쟁에서 중국 편에 서라는 노골적인 압박인 셈이다. 그런데도 정 장관이 순순히 샤먼행에 동의한 걸 보면 조선시대 ‘사대(事大) 외교’가 재연된 것 아니냐는 의심마저 들 판이다. 정 장관은 “우연한 일치”라고 했는데 그런 궁색한 변명은 의혹만 더 부추길 뿐이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 시대 대한민국의 외교 노선은 문재인 대통령 본인이 직접 밝혔다. 지난달 18일 미 국무·국방 장관 접견 도중 10문장 길이의 모두발언에서 네 차례나 ‘한·미 동맹’을 언급하며 외교·안보의 근간임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전 세계에 발신한 정부의 공식 노선인 셈이다. 그런데 정작 외교부 장관은 미국을 건너뛴 채 중국을 방문한다니 말과 행동의 간극이 너무 크다.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은 지난해부터 왕이 외교부장의 초청을 받았으나 아직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한국은 문 정부 4년 내내 중국에 경사돼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정 장관의 방중은 중국 경사론을 더욱 부추길 공산이 크다. 이런 우려를 불식하려면 정 장관은 중국에 할 말은 하고 따질 것은 따지는 당당한 외교를 해야 한다. 눈치보기식 외교는 동맹 이탈과 대중 예속을 부추기는 최악의 결과를 빚을 수 있다. 중국은 샤먼을 찾은 정 장관에게서 “한국이 미국 편에 서지 않겠다”는 발언을 끌어내고 싶어 할 것이다. 정 장관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한·미 동맹에 금이 갈 만한 말과 처신을 조심하면서 우리가 요구할 것을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그것만이 한·미 동맹의 균열을 막고, 우리의 발언권을 키워 외교 입지를 넓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