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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AZ 英 수출 못해”…극단 치닫는 ‘백신 자국우선주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국과 유럽연합(EU) 간의 코로나19 백신 쟁탈전이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백신 공급 부족으로 백신 확보전이 치열해지면서다. 선진국 간 ‘백신 자국우선주의’가 격화하며 개도국의 백신 확보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로이터=연합뉴스 ]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로이터=연합뉴스 ]

21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은 익명의 EU 당국자를 인용해 “EU는 유럽 내에서 제조된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영국에 수출하지 않을 것”이라며 “EU에서 생산된 모든 AZ 백신은 유럽 내에서만 사용될 것”이라고 전했다. 로이터통신도 익명의 당국자를 인용해 “EU가 네덜란드 공장에서 생산된 AZ 백신을 수출하라는 영국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이를 두고 벤 월러스 영국 국방장관은 스카이뉴스에서 “영국을 분리하거나 영국과 벽을 쌓으려는 시도는 영국과 유럽 시민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며 “이로 인한 EU의 평판 손상도 단기간엔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지난 19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세인트 토머스 병원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AP=뉴시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지난 19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세인트 토머스 병원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AP=뉴시스]

영국과 EU는 이미 지난 수 주 동안 백신 수출 문제를 놓고 마찰을 빚어왔다. 앞서 지난 17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까지 나서 “지난 6주 동안 우리는 1000만회 분량의 백신을 영국으로 보냈는데 EU는 영국에서 백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며 “이런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보다 접종률이 높은 국가로의 수출이 균형적인지 재고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백신수출 금지 조치를 직접 언급한 것이다. EU는 올해 1분기 아스트라제네카사에서 받기로 했던 9000만회 접종분의 약 30%인 3000만회분가량만 공급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번 갈등의 표면적인 원인은 영국을 향한 유럽 국가들의 의심이다. 올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를 완료한 영국이 자국에서 생산하는 AZ 백신을 유럽 본토로 충분하면서도 신속하게 공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영국에 수출 금지를 경고하면서 “이는 유럽이 공정한 몫을 차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EU 내 백신 접종률이 10%대에 머물며 발생한 정치·경제적 위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EU의 백신 접종률은 12% 수준으로 37%인 미국, 43%인 영국과 차이가 크다.

다국적 금융그룹 ING는 올해 1분기 유로존 GDP 감소 폭을 0.8%에서 1.5%로 수정했다. 카르스텐 브제스키 이코노미스트는 “3월이면 유럽의 봉쇄 조치가 점진적으로 완화될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한 성장률 예상치였는데 3월 봉쇄 완화 전망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오랜 봉쇄 조치로 국민들의 불만이 누적된데다 접종까지 속도를 내지 못하자 다급해진 EU의 각국 정부가 영국을 향해 백신을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5일(현지 시간) "팬데믹 상황에서 지재권 면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AP=연합뉴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5일(현지 시간) "팬데믹 상황에서 지재권 면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AP=연합뉴스]

EU와 영국의 백신 싸움을 놓고 국제사회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이미 생산된 백신의 90%가량이 잘 사는 일부 국가에 집중됐는데 선진국 간 백신 충돌이 이들의 백신 독점을 심화할 수 있어서다.

뉴욕타임스(NYT)는 21일 “미국, 영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백신 접종을 위해 수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며 “미국 정부가 백신의 지적재산권을 보장하는 등 미국과 유럽 관료들은 수억명의 사람들에게 백신을 보낼 레버리지(지렛대)를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NYT는 “문제 해결을 위해 WHO가 백신 공급 업체들의 노하우를 개발도상국과 나누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지만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다”며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자국만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비영리단체 국제지식생태계(KEI) 소속 제임스 러브 국장은 “문제는 기업들이 하기 싫다는 것”이라면서 “정부는 기업들에 그다지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21일 “미국의 코로나19 백신 생산 및 분배가 늘면서 조 바이든 행정부가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도 백신에 접근하게 해야 한다는 민주당의 압력에 직면했다”며 “세계무역기구(WTO) 회의 전까지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바이든 대통령은 10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도전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백신의 지적재산권 면제를 논의하는 WTO 회의는 내달 중순 열릴 예정이다. 이미 지난해 10월부터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WTO에 지적재산권 협정(TRIPS) 관련 조항을 일시적으로 면제해 다양한 국가에서 백신을 생산하도록 하자고 요구해왔다.

김홍범 기자 kim.hongbu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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