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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약속 깨고 16분 일장연설…美 "기자들 다시 들어오라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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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현지시간)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미ㆍ중 고위급 회담에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8일(현지시간)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미ㆍ중 고위급 회담에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우리 동료들(colleagues) 다시 들어오라고 하세요.”
18일(현지시간)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미ㆍ중 고위급 회담장.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실무 직원들을 향해 손짓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언급한 ‘동료’는 현장 취재 중이던 국무부 출입기자들. 언론에 공개하기로 한 모두발언 순서가 끝나 나가려는 기자들을 장관이 직접 불러세운 전후 사정은 이랬다.

“규범 위반” vs “내정 간섭 말라”

이날 회담은 시작부터 긴장감이 팽팽했다. 블링컨 장관은 “홍콩, 신장, 티벳에서 중국이 벌이는 행동, 또 우리 동맹에 대한 경제적 압박 등은 국제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규범에 기반한 질서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제츠 중국 외교 담당 정치국원은 “내정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며 즉각 응수했다. 그의 발언 요지는 사실상 ‘너나 잘하세요’에 가까웠다.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는 구호로 상징되는 미국 내 인종차별 시위를 언급하며 “미국이 국내 인권 문제에서 더 잘하길 바란다”고 비꼬았다.

18일(현지시간)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미ㆍ중 고위급 회담에서 양제츠 중국 정치국원이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18일(현지시간)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미ㆍ중 고위급 회담에서 양제츠 중국 정치국원이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문제는 이런 내용뿐만이 아니었다. 당초 양측은 모두발언을 2분씩 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외신 기자들에 따르면 블링컨 장관은 2분 27초,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분 17초 동안 발언했다. 하지만 양제츠 위원은 16분 14초, 왕이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4분 9초 동안 말했다.

앵커리지 첫 미ㆍ중 고위급 회담 #모두발언 시간 두고 팽팽한 신경전

中 발언 시간 어기자 블링컨 맞불 

원래 미ㆍ중이 각기 모두발언을 한 뒤 취재 기자들은 현장을 떠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중국 측이 발언 시간을 어기자 블링컨 장관이 예정에 없던 반박에 나섰고, 중국은 또 이를 맞받으며 2차 공방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블링컨 장관은 “우리 동료들은 다시 들어오라”며 기자들에 남아서 이런 상황을 더 취재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양 위원의 발언에 대한 블링컨 장관의 반박은 거의 ‘프리 스타일’에 가까웠다. 원고도 보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발언을 이어갔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고 실수도 한다. 후퇴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에 걸쳐 우리는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이런 도전에 맞섰다. 이를 무시하거나 그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굴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고통스럽고, 추한 상황도 맞닥뜨리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이를 극복하며 더 강해졌고, 더 나아졌고, 더 단합했다.”

中, 한국에도 ‘모두발언 결례’ 전례

사실 이런 식으로 언론에 공개되는 모두발언 기회를 이용해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는 것은 중국이 자주 쓰는 방법이다. 한ㆍ중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ㆍ사드) 체계 배치 문제로 갈등하던 2016년 7월 라오스에서 외교장관 회담이 열렸다. 장소는 왕이 당시 외교부장의 숙소였는데, 처음에 중국은 장소가 협소해 기자들의 현장 취재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에 한국 기자들은 대여섯명 정도만 회담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회담 직전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으니 기자 14명이 들어오라”고 했다. 중국 기자 14명은 이미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모두발언 때는 더 했다. 왕 부장은 “한국이 신뢰를 훼손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또 윤병세 장관이 반박성 모두발언을 시작하자 턱을 괴거나 손사래를 치면서 무례한 태도로 일관하더니, 윤 장관의 발언이 다 끝나기도 전에 중국 외교부 직원들이 기자들을 현장에서 내보냈다. 언론을 이용한 의도적인 외교 결례였다.

미국과 중국이 18일(현지시간) 미국 알래스카에서 고위급 외교 회담에 돌입했다. 연합뉴스

미국과 중국이 18일(현지시간) 미국 알래스카에서 고위급 외교 회담에 돌입했다. 연합뉴스

국무부 “중국 눈길 끄는 데만 관심”

하지만 이날 앵커리지에서 미국은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초장부터 버릇이라도 고치겠다는 듯이 국무부 고위 당국자가 별도로 또 입장을 내고 중국을 비난했다. 이 당국자는 중국이 모두발언 시간 약속을 어긴 것을 지적하며 “우리는 원칙과 가치를 이야기하기 위해 여기 왔는데, 중국은 반대로 내용이 아닌 드라마틱한 형식, 눈길끄는 행위에 더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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