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병 "루게릭"도 향학열 못 꺾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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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不惑)의 나이도, 온몸이 마비되는 난치병도 배움의 열정을 막지 못했다.

25일 성균관대 학위수여식. 휠체어에 앉은 이원규(43)씨가 박사학위를 대표로 받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 손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국문학 박사 학위증을 받아든 아내 이희엽(41)씨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루게릭병으로 6년째 투병 중인 남편이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서울 동성고 영어교사인 이씨에게 병마가 드리워진 것은 1999년 1월. 술에 취한 듯 혀가 꼬이는 것을 발견하고 동네 이비인후과를 찾은 것이 시발이었다. 거듭되는 검사와 진찰 끝에 서울대병원에서 최종 진단을 받는 순간 앞이 캄캄했다.

영문학 석사인 그는 당시 성균관대 국문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하지만 직장도, 학업도 포기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소형 마이크를 옷깃에 꽂고 교단에 섰다. 청년 시절부터 품어 온 문학에의 열정은 더 뜨거워졌다. 석사 학위를 받고 2000년 8월 곧바로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어렵사리 학점을 이수했으나 논문 작성을 앞둔 지난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결국 2학기에 재직 중인 학교에 휴직계를 냈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오른쪽 검지와 중지로 화상 키보드를 두드려 논문을 써나갔다. 책은 바닥에 펼쳐놓고 두 발로 책장을 넘기며 읽었다.

설상가상으로 올 2월에는 검지도 쓸 수 없게 됐다. 가운데 손가락만으로 마우스를 움직이다 보니 보통 사람이 10분에 할 일을 두세 시간 동안 해야 했다. 그러나 논문을 완성하겠다는 일념은 이런 장애를 모두 뛰어넘어 '한국 시(詩)의 고향의식 연구'를 탄생시켰다.

이씨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다"며 공을 아내에게 돌렸다. 최근 들어 그는 혼자서는 설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없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는 여름 방학 동안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침이면 남편의 머리를 감기고, 밥을 떠먹였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남편을 병원에 데리고 가고, 웅얼거리는 소리를 몇 번이나 물어가며 '통역'하는 것도 모두 아내의 몫이다.

"아내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편이 쓴 졸업 소감문을 읽어내려가던 아내는 "오히려 제가 많이 남편에게 의지하고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원규씨는 지난해 12월부터 한국루게릭병연구소(www.alsfree.org)를 이끌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국내 루게릭병 환자 1300여명이 이 연구소를 통해 치료법과 투병생활을 공유하고 있다.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처럼 강의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한마디씩 힘겹게 말한 그의 희망을 아내 이희엽씨가 '통역'했다.

◆ 루게릭병이란
운동신경세포가 파괴되면서 근력 약화.언어 장애.체중 감소.폐렴 등의 증세가 나타나 호흡장애 등으로 사망에 이르는 병. 1930년대 이 병으로 숨진 미국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의 루게릭 선수 이름에서 병명을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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