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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생존 급한데”···초경쟁사회, 90년대생은 출산이 두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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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초(超) 경쟁 한국사회, 출산의지 꺾는다

사상 첫 인구 자연감소, 역대 최저 합계출산율.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사상 첫 인구 자연감소, 역대 최저 합계출산율.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직장인 A 씨(33·여·인천시)는 결혼 3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선뜻 2세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빈부 격차나 집값 급등 등에 따른 고통을 자녀에게 물려주기 싫어서다. A씨는 “학창시절 서울 서초, 목동에서 살았지만 바로 옆 동네에 사는 동창생과도 극심한 학업, 빈부 격차를 느꼈다”며 “준비 없이 자녀를 낳을 경우 이런 박탈감을 아이와 내가 함께 겪게 될까 봐 아이 낳기가 두렵다”고 말했다.

[코로나가 불 당긴 저출산 뇌관-하]

한국사회의 치열한 경쟁 풍토와 빈부 격차, 집값 상승 등이 결혼과 출산에 대한 청년들의 의지를 꺾고 있다. 전문가들은 “입시·취업·이직 등 치열한 경쟁 환경을 경험해온 90년대 생이 평균 출산 연령인 30대에 진입하면서 저출산 경향이 날로 뚜렷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20·30세대의 사회진출 시기가 늦어지면서 초혼과 첫 출산 시기가 자연스레 뒤로 밀렸고, 이는 또 고령 출산에 대한 두려움을 낳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20·30세대의 고용·소득 환경을 더욱 악화시키면서 “출산보다 생존”이라는 의식까지 낳았다.

3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월별 출생등록 인구는 전년보다 월평균 10.5% 감소했다. 1년 전인 2019년 월평균 7.5% 감소한 것보다 3%포인트 감소 폭이 커졌다. 이중 작년 4월(-15.8%), 5월(-16.2%), 10월(-19.5%)은 지난 10년간 같은 달에 비해 등록 출생아 수가 가장 많이 떨어졌다. 임신 기간을 고려하면 이 시기 출생아 감소는 코로나19로 인한 혼인 감소와 관련이 적은 ‘기조적 저출생’으로 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경쟁 헤쳐온 90년생, 출산 적령기 진입

2030세대결혼관.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2030세대결혼관.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원인은 뭘까.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1980~2000년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의 중심에 있는 90년대생이 지난해부터 30대에 들어온 게 가장 큰 요인이 된 것으로 본다”고 진단했다. 혼인과 출산을 가장 많이 하는 30~34세에 90년생이 진출하며 저출생 경향이 빨라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조 교수는 “같은 밀레니얼 세대라도 ‘82년생 김지영’에 비해 ‘90년생이 온다’의 주인공들은 결혼·출산에 대한 가치관이 더 부정적”이라고 말했다.

젊은층의 가치관이 변한 배경에는 초(超) 경쟁문화가 있는 것으로 진단됐다. 한국은행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인구구조 변화 여건 점검」보고서에서 “코로나19 이전에도 이미 젊은층은 거센 경쟁환경에 노출돼 있었고 이에 따라 긍정적인 결혼관이 축소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또 “인구와 자원의 집중화로 대도시·수도권 내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그 외 지역에선 대도시·수도권으로 진입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며 “미래(출산)를 선택하기보다는 현실(생존)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90년생, “돌아보니 치열함 뿐…출산보다 행복”

지난해 10월 서울 성동구 덕수고등학교에서 열린 '2020 덕수고 동문 기업 취업박람회'에서 학생들이 취업 현장 면접을 보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뉴스1]

지난해 10월 서울 성동구 덕수고등학교에서 열린 '2020 덕수고 동문 기업 취업박람회'에서 학생들이 취업 현장 면접을 보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뉴스1]

곧 30대에 진입하는 미혼 여성들의 생각 역시 이 같은 분석과 다르지 않다. 1992년생인 직장인 B 씨(여·29)는 “수차례 이직을 거쳐 이제 겨우 안정된 직장을 잡았다”며 “이제야 나를 위해 돈과 여가를 쓸 수 있게 됐는데, 아이를 낳으면 또다시 10여년이 넘는 시간을 빼앗길 것 같다”고 말했다. B 씨는 “아이를 낳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불확실한 행복이란 생각이 든다”며 “출산 후 경력 단절이 될 가능성도 높은 만큼 미래를 포기하더라도 현재의 확실한 행복을 챙기고 싶다”고 말했다.

1990년생인 또 다른 직장인 C 씨(31·여)도 “돌아보면 늘 경쟁하고 잘해야 하는 강박관념 때문에 행복했다고 느꼈던 순간이 거의 없었다”며 “매 순간 치열한 삶을 자식에게 대물림하느니 차라리 나 자신이나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20·30대의 결혼·출산에 대한 인식 변화는 통계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지난해 통계청의 사회조사에 따르면 30대 중 ‘결혼을 반드시 하거나 하면 좋다’고 응답한 비율은 전체의 42.2%로 나타났다. 10년 전인 2008년 60.8%에 비해 긍정적인 인식이 크게 줄어든 결과다. 같은 기간 20대의 긍정적 반응은 61.9%에서 35.4%로 절반 가까이 내려앉았다.

늦어지는 초혼연령…“고령 출산 우려”

늦어지는초혼출산.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늦어지는초혼출산.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첫 아이를 낳는 연령이 매년 높아지는 것도 출산율을 낮추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지난해 여성들이 첫 아이를 출산한 시기는 만 32.3세로 10년 전(30.1세)보다 2년 넘게 늦춰졌다. 여성의 초혼 연령이 2009년 28.7세에서 2019년에는 30.6세로 2년 가까이 늦어진 결과다. “여성들은 만 35세 이상의 고령 출산에 큰 두려움을 느낀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인구전문가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양육비·일자리·주거비 등 사회복지 제도를 전반적으로 손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합계 출산율 0.84명으로 세계 최하위를 기록한 데 더해 코로나19로 인한 고용 절벽 등 경제적 압박이 날로 커지고 있어서다. 행안부에 따르면 올해 1·2월 전국 출생아 수는 4만3289명으로 10년 전인 2011년 1·2월(8만1461명)에 비해 53.1% 수준까지 떨어져 초(超) 저출산 공포가 커지고 있다.

최슬기 한국개발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미취업 상태나 이직을 생각했던 청년층이 코로나19를 만나면서 결혼·출산 시기가 향후 더 늦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며 “교육을 포함한 양육, 주거비 등 전반적으로 출산에 드는 비용을 낮추면서 양육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복지제도를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삼식 한양대 고령사회연구원장은 “저출생, 고령화 경향을 단기간에 되돌리기 힘든 만큼 정년연장, 연금개혁 등 사회적 논의를 시급히 시작해야 한다”며 “고용, 교육, 주거 등 사회시스템의 전반적인 개선 없이 기존의 일회성 지원만으론 저출산 문제를 해소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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