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제재 전체 다시 검토하자”며 예외 확대 설득하겠다는 이인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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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대북 제재에 대한 포괄적 검토와 효과 재평가를 제안했다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가 26일 보도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23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에서 열린 한반도 생명·안전 공동체 세미나에서 축사하고 있다. 뉴스1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23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에서 열린 한반도 생명·안전 공동체 세미나에서 축사하고 있다. 뉴스1

이 장관은 FT 인터뷰에서 “우리는 북한의 상황을 매우 신중하고 우려스럽게 지켜보고 있으며, 인도주의적 위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이 당장 1990년대 기근 때만큼 심각한 식량난에 봉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지만, 국제사회는 북한의 식량 공급 상황이 미래에도 지속가능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제재, 비핵화에 기여하는지 살펴봐야”

FT는 “이 장관은 잠재적 위기에 대비해 2016년 이후 미국에 의해 강화된 제재의 효과(efficacy)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이 장관은 구체적으로 “5년 간 강한 제재가 이뤄졌고, 이제는 제재가 성공적인 북한 비핵화 프로세스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지 아닌지 살펴볼 때가 된 것 같다. 포괄적 검토를 통해 제재가 일반 북한 주민에 미치는 영향도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FT는 “통일부는 북한과의 철도ㆍ도로 협력을 위한 국제적 지원을 받기 위한 계획을 마련 중”이라며 “이 장관은 비상업적·공공 인프라 프로젝트를 위해 제재 상 인도주의적 지원에 대한 예외를 확대하거나 보다 큰 유연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제안했다”고 전했다. FT는 이 장관이 '북한이 군용이나 핵 개발에 이를 활용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한국이 증명할 수 있는 한'이라는 취지의 전제도 붙였다고 소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제사회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도록 설득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FT는 추후 '한국과 다른 국가들이…증명할 수 있는 한'으로 표현을 일부 수정했다.

"북한 주민에 미치는 영향도 평가해야"

하지만 이는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정책 리뷰를 진행 중인 가운데 한국의 통일부 장관이 제재의 효용성 자체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표출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대목이다. FT도 "한국이 제재가 북한의 핵 개발을 억제하는 것인지 효과에 의문을 제기했다"고 해석했다.
대북 제재는 ‘스마트 제재’로 불린다. 민생에 대한 영향을 제한하고 지도부가 핵ㆍ미사일 개발에 쓰거나 통치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는 돈줄을 죄는 표적 제재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를 최대한 막기 위해 모든 제재에는 인도주의적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지금 제재 체제에서도 인도적 지원은 가능한데,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북한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26일 이인영 통일부 장관의 인터뷰 내용을 실은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FT 웹사이트 캡처

26일 이인영 통일부 장관의 인터뷰 내용을 실은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FT 웹사이트 캡처

그런데 이를 이유로 제재 전체를 다시 검토하자는 이 장관의 제안은 제재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처럼 해석될 여지마저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북한뿐 아니라 어떤 국가를 대상으로 한 제재도 애초에 성립되기 어렵다.
이 장관은 또 제재 예외를 위해 북한의 전용 방지를 입증할 수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하지만 유엔 대북 제재가 이중용도 물품을 포괄적으로 차단하는 건 그만큼 전용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핵무장을 공언하는 북한이 예외를 인정받아 입수한 물자로 딴짓을 하지 않는다고 한국이 확인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국가 신인도와 직결되는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제재 타깃은 김정은에 가는 돈줄

대북 제재 마련 과정에 직접 관여한 적 있는 한 인사는 “2017년 이후 이뤄진 국제적 대북 제재의 핵심은 김정은과 당, 군부로 흘러가는 돈줄을 막는 것”이라며 “북한 주민의 장마당 활동 등은 사실 제재로는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2018년 북ㆍ미 싱가포르 정상회담 전후부터는 제재 체제가 전처럼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고 있어 이를 민생 피해로 직결하는 건 더더욱 무리”라고 덧붙였다. 북한 주민의 생활고는 오히려 코로나19로 인한 국경 봉쇄와 수해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측면이 크다는 뜻이다.    
이 장관은 비핵화 측면에서 제재의 효용성을 문제삼는 듯한 발언도 했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고 비핵화를 논의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조차도 제재의 효과는 의심하지 않았다. 한 전직 외교관은 “협상 방법이나 비핵화 상응조치 등 본질적 내용을 두고선 여러 말이 나왔지만, 확고한 제재 체제가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냈다는 점만큼은 트럼프 행정부 전체가 공감했다. 이를 토대로 협상에 임했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도 결정적 비핵화 조치 전까지 제재만은 절대 건드리지 못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유지한 것”이라고 전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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