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이제는 산업이다] 전문가 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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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의료서비스 혁신에 한창이다. 싱가포르는 총리가 나서 아시아의 의료 허브(중심)를 진두지휘하면서 외국인 환자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은 사회주의 의료 체제를 벗어던졌다. 일본도 규제를 대담하게 풀면서 한국 환자를 손짓하고 있다. 본지는 '의료, 이제는 산업이다'시리즈(5월 18~22일자)에 이어 24일 전문가들의 토론을 통해 의료산업화의 대안을 모색했다. 토론에는 유태전 병원협회장, 문경태 보건복지부 기획관리실장,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이 참여했으며 정기택 경희대 의료산업연구원장이 사회를 맡았다.

▶정기택 교수=최근 국민이 지출하는 의료비가 급증하는 등 여러 지표로 볼 때 의료를 산업으로 볼 시점이 됐습니다. 현 정부도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의료를 산업으로 보자는 입장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아직 무엇이 의료산업인지, 명확한 범주에 대한 논의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핵심인 병원은 공공 사회 서비스 산업군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제조업으로 분류돼 있어요. 이런 방식으로는 차세대 성장엔진으로서의 의료산업을 바라보기 힘듭니다.

▶유태전 회장=우리나라의 의료비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5.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8.1%)보다 적은 편입니다. 국가에서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의료산업의 기반인 연구.교육 분야에 대한 국가 투자가 그동안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 의료기술은 세계적 수준에 올라섰습니다. 여기에 시설.장비.인력 양성을 조금만 보태면 금방 경쟁력이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경태 기획관리실장=의료를 산업으로 보는 점에 대해 OECD 회원국에선 이의가 없습니다. 선진국들은 이미 의료 분야의 연구.개발에 많이 투자해 혁신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1950~60년대의 의료는 가내수공업이었습니다. 수술대.진찰대와 몇가지 기구만 있으면 됐지요. 80년대 이후부터 고가 장비가 투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의료의 패러다임이 과거와 달라져 이제는 산업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통수단이 발전하면서 의료 서비스에서는 국제적인 가격경쟁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태국의 병원이 싸고 좋다고 하면 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환자들이 태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갈 곳 없는 자금이 400조원이 넘는다지만 정작 의사들은 이런 돈을 끌어들여 제대로 투자할 수가 없습니다. 제조업이 공동화하면 건전한 서비스 산업이 그 자리를 메워야 하는 데 교육.레저와 함께 의료가 대표적인 분야가 됩니다.

▶정=산업으로서 제대로 보려면 우선 어떻게 부가가치를 창출하느냐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유능한 인재가 모였다는 의료계에 대한 규제가 너무 심해 이들이 운신을 못하고 있습니다.

▶유=병원 입장에선 건강보험 강제 지정제가 큰 문제입니다. 이 때문에 고품질의 요양이 가능한 의료기관 설립이 막혀 있습니다. 또 병원이 각종 수익사업을 할 수 없어 기껏 주차장이나 장례식장을 운영해 이익을 내는 현실도 고쳐야 합니다. 또 사보험을 허용해 비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해외에 가지 않아도 고급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이게 안 되고 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국가가 투자를 늘리는 것입니다. 당장 GDP의 10%까지는 올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그러나 의료비용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기만 하는 시스템은 곤란합니다. 복지예산이 GDP의 몇%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비용에 비해 효율을 높일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의료계도 자발적으로 비용을 절감하고, 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야 합니다.

▶문=의료산업을 병원 경영에만 한정하지 말고 제약이나 의료기기를 포함해 봐야 합니다. 보건의료 산업은 그 나라의 정치.사회적인 상황과 이념에 좌우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미국은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투자도 민간이 하고 가격도 자율적입니다. 반면 너무 시장 중심이라 전 국민의 20%가 기본적인 보건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도 생겨났지요. 반면 의료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유럽을 보면 의대생 대부분이 무료로 학교를 다니고 졸업하면 거의 공무원이 됩니다.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이들은 의사로 근무하는 데 보람을 느낄 뿐 돈을 벌려면 경영학을 공부해 사업가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의사라는 직업의 가치는 그 나라 상황에 따라 다른데 우리나라에는 이런 두 가지 관점이 섞여 있습니다.

▶유=의사들이 어느 정도 대우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련 기간의 의사들에 대한 대우가 지나치게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병원 경영이 너무 어렵다는 점이지요. 유럽은 민간 비율이 5%고, 95%를 정부가 돈을 내 운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민간 자본이 병원을 설립.운영하는데 정부가 여기서 이익을 못 내게 제한하는 식입니다. 그러니 전체 병원의 10% 가까이가 매년 도산하고 부채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민간 병원에도 정부 예산을 투자해야 합니다. 특히 응급실이나 심장센터.암센터처럼 돈이 많이 드는 곳에 정부가 투자해야 해요.

▶노=영리법인을 허용하면 산업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이 병원에 투자해야 지금보다 서비스가 좋아집니다. 지금 병원들은 부채에 짓눌려 있습니다. 흔히 영리법인을 허용하라고 하면 이익만 챙긴다고 생각하는데 그보다 영속성이 문제입니다. 지금은 개인이 병원을 운영하다 설립자가 죽은 뒤 상속세를 내면 병원은 껍데기만 남고 끝납니다. 영리법인이 허용되면 무엇보다 병원의 영속성이 생깁니다. 직원이나 사회에도 안정적으로 공헌할 수 있게 되지요.

▶문=보건복지부에서도 의료산업 육성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병원 산업에 자본 유입이 가능토록 검토 중입니다. 장기적으로 비영리.공익법인만 허용해 왔던 것을 영리법인도 허용하고 병원이나 약국을 의사.약사만 독점하던 것을 개방하는 방향으로 갈 겁니다.

▶유=병원산업의 문제점은 비영리 법인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생겨납니다. 삼성서울.아산중앙병원은 재단 법인으로 만들어 이익금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영리법인이나 사보험을 허용해 건강보험의 부족한 부분을 일부 보충해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국민은 질 높은 진료를 원하지만 수가가 평준화돼 있는 한 어렵습니다.

▶문=사보험은 건강보험이 튼튼해진 상황에서 도입을 고려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보건의료를 개방하고 세계 일류화로 간다는 게 정책 목표입니다. 이것과 공공기반의 확충은 같이 가야 합니다. 우리는 미국도 유럽도 아닙니다.

▶정=영리법인은 모두 주식회사형 병원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의무법인형' 병원도 있습니다. 주식회사형 병원이라면 병원 자체의 본질적인 경쟁력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의 래플즈병원이 샴 쌍둥이 수술에 성공했을 때 병원 주가에 영향을 줬습니다. 이런 게 제대로 된 시스템이지요. 이런 고려 없이 무조건 풀기만 하면 병원 주식회사가 아니라 장례식장을 포함한 의료사업 주식회사가 돼 버릴 수도 있습니다.

▶문=그래도 국내에 희망이 있어요. 우리 의료기술이나 금속공학.화학.생물학 등 기초과학의 수준이 높고 정보기술(IT)기반도 잘돼 있습니다. 다만 부족한 것은 보건의료 산업에 대기업이 진입하기에는 메리트가 부족하고 시장 개척에 미흡하다는 것이지요.

▶정=병원 경영자의 자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경영을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의사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병원업을 잘 이해하고 애착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한다는 얘기지요.

▶정=지금까지 병원은 병원 행정가가 책임져 왔습니다. 이제 이들이 병원 경영자로 바뀌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단순한 업무 집행에 불과했다면 앞으로는 시장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복합적 시각을 갖춰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병원 체인 등에서 100만달러 연봉을 받는 병원 경영 전문 MBA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시대가 올 것인데 거기에 맞는 경영자가 나와야 합니다.

<의료 산업화를 위한 전문가 제언>

▶의료도 산업
"차세대 성장전략으로 투자할 때"

▶영리 의료법인
"자본의 의료분야 투자 이끌어야"

▶건강보험 강제 지정제
"의료 하향 평준화 막게 없애라"

▶민간 의료보험
"공공 보험 보완수단으로 도입을"

▶신약.신의료 기술
"허가 절차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공공의료 확충
"민간 기피하는 분야에 집중 투자 해야"

▶의사의 병원 개설.운영 독점
"의사는 진료 전문가일 뿐 병원 소유권에 집착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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