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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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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①지금까지의 특별사면(이하 사면) 조치가 정당했다고 생각합니까. ②비리 정치인 면죄 도구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까. ③사면제도가 법적 형평성을 해친다고 생각합니까.

노무현 정부 임기 첫해가 저물어가던 2003년 말, 법조인 200여명이 손에 쥔 설문지를 골똘히 응시했다. 비슷한 수의 일반 국민도 머리를 맞댔다. 법무부 의뢰로 형사정책연구원이 시행한 사면 제도 관련 설문조사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모든 영역의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전공이었던 사법 분야도 빼놓지 않았다. 사면권 관련 설문조사와 용역 연구 역시 이런 차원에서 이뤄졌다.

용감한 시도였다. 헌법상 대통령 권한의 ‘끝판왕’ 격인 사면권에 스스로 제동을 걸겠다는 취지가 깔려있어서다. 형정원도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헌정질서 파괴, 선거법 위반, 부패, 반인륜·반인도주의 사범에 대한 사면 제한 등 내용의 고강도 개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 정권 말이 돼서야 차(車)·포(包)·마(馬)·상(象)이 다 떨어진 누더기로 국회를 통과했다. 살아남은 건 사면심사위원회 설치, 단 하나였다. ‘헌정 사상 첫 사면법 개정’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민망했다. 노 대통령도 결국 ‘절대 반지’를 버리지 못했다.

후임자들 역시 사법부의 봉인을 해제해 일거에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사면권의 위력을 외면하지 않았고, 사면의 남발 속에서 사법 정의는 형해화, 희화화했다. 시혜자와 그 대행자들은 사면을 정치적 무기 삼아 피선거권의 회복이 절실한 이들을 유혹했고, 힘깨나 쓴다는 기결수와 전과자들은 거듭된 호의를 권리로 착각하면서 당연하다는 듯 수혜를 요구했다.

신년 벽두에 ‘역사 바로 세우기’를 그토록 강조하던 정치세력의 대표 입에서 그 세력이 대역죄인 수준으로 비판했던 전직 대통령 사면 요구가 나왔다. 사법부 판결을 무시한 채 음모론을 들먹이는 이와 법정 출석까지 거부하는 이까지 일방 구애식 사면 대상으로 삼은 건 그 세력의 유서 깊은 ‘언행 불일치’ 관행을 참작하더라도 진귀한 구경거리다. 국민 대화합 명목으로 이뤄진 예비 선거운동 차원의 사면이 어떤 폐해를 남기는지는 사면 24년 차에 접어든,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이 잘 보여주고 있다. 새 용례가 아니라 반면교사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