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클리닉] 주식에 중독된 남편

중앙일보

입력

세 자녀를 둔 결혼한지 13년된 주부입니다.

신혼 때부터 남편과의 성격 차이는 분명히 있었죠. 늘 편하게만 살려는 그와, 하나라도 제대로 하자는 제 성격이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러다 차츰 서로 적응하게 됐습니다. 명문대 출신 남편은 좋은 직장에 다녀 경제적으로도 안정됐지요.

그러나 한순간에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남편은 3년 전 상의도 없이 회사를 그만뒀어요. 주식을 하기 위해서랍니다. 말려도 보고 사정도 해보고 겁도 주고 안 해본 것이 없어요. 그는 돈이 없어도 증권회사 객장에 나가 살았지요.

백수 생활 1년이 됐을 때 제가 이혼을 요구하자 남편은 아이들과 모든 걸 다 양보하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더군요. 아이는 포기해도 주식은 포기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차마 이혼은 할 수 없기에 제가 양보하고 돈을 주기로 했죠. 그는 원금의 20%를 잃으면 주식을 안하고 직장에 다니겠다고 각서를 쓰더군요.

두달 만에 그것 또한 깡통이 됐습니다. 그래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는 늘 이랬죠. 결혼해서 지금까지 약속을 지킨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생활비도 바닥나고 우리 부부의 갈등과 말다툼은 더 심해졌습니다. 몇 달을 그렇게 생활하다 남편은 다른 직장을 구했어요.

그러나 지난해 가을 회사를 또 그만뒀습니다. 주식에 정신을 팔고 있는데 일이 손에 잡히겠습니까. 지금도 그는 증권회사 객장에서 살고 있어요.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나 객장에 나갔습니다.

주말엔 경마장으로 향하죠. 제가 그에게 준 돈만 수천만원입니다.

최근에는 돈을 주지 않았더니 얼마 전 시누이에게서 돈을 빌렸다는군요.

이젠 희망이 안 보입니다. 버스비가 없어도 걸어가면 걸어갔지, 누구에게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지는 못할 사람이었거든요.

생활비가 없다고 하자 남편은 돈좀 아껴쓰라고 하네요.

예전에는 돈을 너무 못 벌어다 줘 미안하다던 사람이었는데 변해도 너무 변했어요. 직장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하기에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이젠 남편에 대한 신뢰가 없어요. 믿음없이 산다는 게 너무 힘듭니다. 남편과 얘기를 해보려 하면 집을 나가버립니다.

또다시 직장을 그만뒀다는 얘기를 친정 식구들에겐 차마 하지도 못했어요. 시댁에서도 처음 회사를 그만둘 때는 정신과 치료를 하자고 하더니 이제는 제가 잘못해서 그렇다는군요. 혼자만 끙끙 앓다 보니 제 성격이 불같아지고 다혈질로 변했어요. 남편 문제 때문에 신경쓰다 보니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소홀하게 됩니다.

남편은 워낙 내성적이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인간관계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었죠. 주식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니 잘 맞지요. 그렇지만 진득하지 못해 하루에도 수십번씩 팔고 사며 늘 돈을 잃기만 합니다.

저라도 생활비를 벌면 좋으련만. 세 아이를 혼자 키우며 13년을 보낸 데다 사고 후유증으로 허리를 잘 못써요.

그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나몰라라 하는 남편을 보면 더 화가 납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성실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남편은 일확천금만 꿈꾸고 있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경기도 고양에서 박순영(가명)]

◇ [전문가의 눈] 도박으로 빚진 돈 갚아주지 말아야

엄격한 의미에서 주식은 도박이 아니지만 진행 양상과 후유증은 때로 도박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중독된 사람에게는 그런 충고가 먹히지 않지요.

도박 중독자들 중에는 내성적이라 친구나 사회활동이 적은 사람이 많습니다. 우울.불안 성향도 높은 편이고요. 직장에 적응하기 힘들어하지만 스트레스를 적절히 푸는 능력은 부족합니다. 경쟁을 즐기거나 스릴을 즐기는 유형도 도박에 많이 빠집니다.

주식 중독 등에 대처하려면 우선 남편에게 돈을 주거나 빚을 대신 갚아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증세가 만성화합니다. 반드시 본인이 결과를 책임지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은 부인의 어떤 행동도 남편의 중독 행위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일단 중독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제일 중요하므로 남편이 정신과 상담을 받도록 설득하십시오.

"중독이므로 치료받아야 한다"는 식의 말은 먹히지 않습니다. 남편의 정서적인 측면에 관심을 갖고 대화와 권유를 시작하세요. 남편도 큰 돈을 잃고 얼마나 화가 나고 우울하겠습니까. 잠인들 제대로 잘 수 있겠습니까.

남편의 이런 어려운 점을 함께 의논하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자고 권유하세요. 그래도 거부한다면 부인이라도 먼저 상담을 받아보도록 권합니다. 도박 중독자.가족의 모임인 '단도박 친목 모임'도 반드시 찾아가십시오.

남편의 중독 행위를 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원상회복이 되지는 않습니다.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정신적.영적 회복과 치유도 필요합니다. 남편이 원래의 모습을 찾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인내심을 갖기 바랍니다.

신영철 <강북삼성병원 정신과.도박중독클리닉 전문의>

◇ [경험자의 말] '동병상련' 모임 3년째…이제는 본전 집착 버려

1991년에 주식을 시작했습니다. 크게 잃자 본전에 대한 집착 때문에 더 빠졌습니다. 1년 만에 3억원을 날렸죠.

이후 주식에서는 손을 뗐지만 잃은 돈 생각에 화가 나면 경마.슬롯머신을 했습니다. 주식보다는 적은 돈으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외환위기를 전후해 적금.보험금에 사업자금을 다 털어 4억원을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남편분처럼 매일 객장에 나가는 생활이 시작됐지요. 상황판을 안보면 답답하니까요. 결국 다 날렸죠.

사업은 망하기 직전이었고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단도박 친목 모임'(www.dandobak.co.kr.02-521-2141)에 나갔습니다. 이곳에서 내가 도박 중독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매일 객장에 나가거나 다른 생활에 지장을 준다면 중독된 겁니다. 다른 일에는 흥미를 못느끼죠.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 주식에 빠지니까 인간관계는 더 엉망이 됩니다.

비슷한 경험을 해 서로 이해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 전에는 내 인생이 세상에서 제일 꼬였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나보다 더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남편도 지금쯤 멈출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겁니다. 주식을 끊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중독에 빠지게 한 성격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모임에 나간 지 3년째.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주식으로는 본전을 찾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는 사람들 만나는 게 좋아 모임에 나갑니다.

남편이 거부한다면 부인이라도 먼저 '중독자 가족 모임'(02-522-8483)을 찾으십시오. 중독은 온 가족을 멍들게 합니다. 부인의 상처를 먼저 치유하고 남편을 도울 방법을 찾으십시오.

이제 우리 부부의 가장 큰 다툼거리는 "치약을 아래쪽부터 짜라"는 등의 문제입니다. 주식이 아니라도 할 일은 너무 많습니다. 이제 행복이 뭔지 알 것 같습니다.

정민수(47.가명.서울 서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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