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푸스를 이겨나가는 멋진 모든 분들에게

중앙일보

입력

조절이 안되는 5%를 바라보기보다 조절이 잘되는 95%를 바라보며, 또 5% 마저도 극복할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진찰실에서 루푸스를 극복해 나가는 많은 분들을 만납니다.
루푸스를 이겨나가는 멋진 모든 분들에게 씁니다.

편지를 쓰기 위해 진찰실에 내려왔습니다. 이런 시간에 내려오는 일은 좀처럼 드물지만, 진찰실에서 띄운 편지를 쓰기에는 진찰실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왔습니다.

진료가 없는 방은 오랜만에 맘껏 여유를 부리고 있었으나, 환자가 찾아주지 않을 때의 이 방은 과연 왜 존재할까 생각이 들 정도로 삭막하고 쓸모 없이 보였습니다. 달랑 책상하나 의자 두서너 개, 진료용 침대, 그리고 삭막한 컴퓨터와 예약날짜를 잡아주는 3개월 치 날짜가 한 장에 보이는 달력 한 개가 아무 의미 없이 흩어져 있습니다.

어두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으려니까, 이곳을 통해 스쳐간 하루에도 수십 통 편지분량이 넘는 사연들이 하나, 둘씩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 곳이 얼마나 많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희로애락이 교차하고, 생동감 넘치는 곳인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찬바람이 제법 매몰차던 늦가을 어느날, 말을 제대로 못 이을 정도로 숨이 차서 응급실로 온 한 젊은 여성을 만났습니다. 루푸스로 진단 받은 지 일 개월 남짓, 서점 점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디딘 지 얼마 되지 않은 사회의 초년병이었으며, 루푸스라는 질병에도 초년병이었던 그녀.

그녀의 얼굴이 몇 해가 지나도록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호흡곤란이 그렇게도 심한 상황에서도 보였던 그 미소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화를 나눌 틈도 없이 환자는 객혈을 했고, 빠른 속도로 진료팀은 인공호흡기를 걸고 중환자실로 이송하였으며, 환자는 루푸스 폐렴으로 진단되었습니다.

◇ 긍정적인 환자, 그리고 믿음으로 지켜봐 주는 가족들...

환자는 매우 위독한 상황이었으며, 환자를 살리기 위해 강력한 면역억제 요법을 시작하였습니다. 환자는 폐출혈이 지속되고, 며칠간 의식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희망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다고 느꼈을 무렵, 가족들은 놀랍게도 오히려 희망이 가득찬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성경책도 읽어주고,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한 편지를 써서 머리맡에 놓아두고, 꼭 깨어날거라고 오히려 우리를 격려했습니다.

어느날 아침, 가족들의 소망처럼 저도 의식 없는 환자에게 “오늘 아침 기분이 좀 어떠세요?”라고 일방적인 질문을 던졌고, 그때 갑자기 환자는 움직임을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손짓을 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며, 눈을 깜박였습니다. 그때 느꼈던 가슴 뭉클한 감동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 모두의 긍정적인 노력이 더해져야 비로서 치료가 완성될 수 있어...

환자는 계속 좋아졌고, 비록 장기간 병원 생활을 했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긴 병상생활을 하며 늘 밝은 모습을 보여주던 환자가 퇴원하면 병원에 비추는 밝은 햇살이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최악의 질병 상태에서 만난 가장 긍정적인 환자, 그리고 믿음으로 지켜봐 주는 가족들, 의사, 환자 모두의 긍정적 노력이 더해져야 치료가 비로서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소중한 환자였습니다.

사물은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하네요. 망치를 손에 든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세상이 모두 못으로 보이고, 어떤 사람은 세상에 쓸만한 못이 하나도 없어 망치를 버린다고 합니다.

조절이 안되는 5%를 바라보기보다 조절이 잘되는 95%를 바라보며, 또 5% 마저도 극복할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진찰실에서 루푸스를 극복해 나가는 많은 분들을 만납니다.

진료 할 때 마다 저는 수 많은 편지를 마음속으로 써봅니다. 루푸스를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길 바라며. 그리고 제 마음의 편지가 전달되길 바라며…

[출처] 루푸스를 이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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