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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야당 대선 후보 키우는 여권의 자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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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호 31면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정말 한 가지는 지켰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든 것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한 약속이었다. 새로운 경험이 한두 번도 아니다. 매일 같이 자고 일어나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일들이 벌어져 있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자기들이 임명 검찰총장·감사원장 #적임자라더니 핍박과 모욕 퍼부어 #능력없는 야당의 대선후보 만들어 #서울시장 후보까지 제공하나보다

온갖 권력형 비리(아직까지는 의혹이다)는 화나지만 놀랍지는 않다. 역대 정권에서도 누누이 봐왔던 일이다. 조금 놀랍다면 그토록 깨끗한 척하던 자칭 진보세력이 사이비 보수들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었다는 것 정도다.

비리 은폐 시도도 역겹지만 놀랍지는 않다. 권력형 비리와 은폐 시도는 동행하기 마련인 거다. 조금 다른 건 비리를 숨기려는 법무장관과 비리를 파헤치려는 검찰총장의 대립인데, 사람 잘못 보고 잘못 써서 된통 당하는 정권이 딱할 뿐이지 놀랄 것도 못 된다. 과거 정권들에서도 파헤침이 없었지, 비리와 은폐가 없었겠나 말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정말 놀라운 것은 어쩜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느냐는 거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면서도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일일신 우일신, 나날이 뻔뻔해지고 또 새롭게 뻔뻔해진다.

‘감히’ 권력을 향해 칼끝을 겨누는 검찰총장의 팔다리를 모조리 자르며 “검찰 개혁”을 부르짖은 법무장관이다. 모략 냄새 물씬한 ‘검언(檢言)유착’ 소동에는 옳다거니 유례없는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그 결과가 오히려 ‘권언(權言)유착’으로 밝혀졌으면 부끄러움을 알고 자숙했어야 한다.

그런데도 앞뒤도 맞지 않는 사기꾼의 편지 한 통(이것 역시 음모의 향기가 짙은)에 또다시 수사지휘권을 발동하며 입에 거품을 문다. 목표는 오로지 검찰총장의 목을 날리는 거면서 “국민 기만”을 운운하며 “언론은 대검을 저격하라”고 주문한다. 정작 자기가 사건을 정치화하면서 마치 검찰이 정치화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한 것처럼 몰아가는 것이다.

선데이 칼럼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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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국민이 이런 ‘무법장관’을 부끄러워하는데, 청와대와 여당은 “우쭈쭈” 어르며 맞장구를 친다. 국민의 대표인지, 정권의 대변인인지 모를 어떤 의원은 “범이 내려와서 검찰들이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있는 형국”이라고까지 추켜세웠다. 청와대는 “성역을 가리지 않는 수사”를 주문하는 뻔뻔함의 극치를 선보인다. 나 원 참, 이 난리가 당초 어디에서 출발한 건가. 최고 권력과 검찰총장 주변 중 어느 곳이 더 성역일런가.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하면 안 된다. 남아나질 못한다. 조그만 잘못이라도 지적하면 좌표가 찍히고, ‘홍위병’들의 문자 폭탄이 날아든다. 이러니 “정치는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게임이 아니다”고 말할 수 있는 반듯한 사람마저 설 자리가 없다.

사실 그것은 대통령 책임이 크다. 대선 후보 시절 이른바 ‘양념 부대’의 존재를 승인한 것에서 우리 편만 좋은 편이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는 ‘지극 뻔뻔’의 분위기가 싹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소심한 공무원들이 감사원의 현장감사 전날 한밤중에 몰래 사무실에 들어가 파일을 삭제하는 조직범죄형 대담함을 과시할 수 있었겠나. 삭제된 444개 파일 중에는 복구돼도 내용을 알아볼 수 없도록 파일명 등을 수정해 다시 저장한 뒤 삭제하는 전문가적 치밀함도 보였다.

그렇게 감사를 방해해 감사원이 월성 1호기 조기 폐쇄가 옳았는지 판단하는 걸 가로막았다. 범법 행위에 대한 처벌도 제대로 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런데도 개인적 일탈로 치부해버린다. 국민을 개돼지로 여기지 않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뻔뻔함이다.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은 이런 거나 검찰이 나서 철저하게 수사하도록 발동하는 게 상식 아닐까.

이런 비상식이 놀랍지만, 진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정부와 여당이 뻔뻔함의 수준을 거듭 갱신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야당에 자선을 베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제1야당은 스스로 대선 후보를 낼 능력이 없는 처지다. 부동산 실정, 추미애 정국, 라임·옵티머스 사태 등 문제가 꼬리를 물고, 정권의 뻔뻔한 대처가 포개지는데도 야당의 지지율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이다. 이 정도면 내부에서는 경쟁력 있는 후보가 없다고 봐야 한다.

이런 상황을 웃으며 즐기던 여권이다. 자기들이 임명한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을 마음껏 핍박하고 모욕할 수 있던 것도 그처럼 허약한 야당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에 대한 망치질을 거듭할수록 두 사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아이러니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담금질을 견디고 부러지지만 않는다면 두 사람이 야권의 대선주자 반열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다. 게다가 두 사람이 선의의 경쟁을 한다면 효과는 더욱 커진다. 자칫 여당 후보들만의 경쟁으로 싱거울 뻔했던 대선에 긴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여기에 여당은 이제 가난한 야당에 서울시장 후보까지 제공하려 하고 있다. 금태섭 전 의원이 말을 아끼고 있지만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뻔뻔함을 시전하며 국민 분노를 유발하는 여권이 남모르게 가난한 야권을 돕는 미담이란 정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일 아닌가.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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