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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폭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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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대여섯평이나 될까 싶은, 좁은 공간을 수십명의 장정이 빼곡히 메웠다. 인산인해에 짓눌렸던 기자는 겨우 오른손을 빼내 왼손에 쥐고 있던 수첩에 글씨 비슷할 것을 적을 수 있었다. 땀을 닦기 위해 신체 부위를 움직일 만한 공간조차 없었다.

2000년 9월 21일 서울 역삼동의 한 시민단체 사무실에서 운집한 기자들은 한 중년 사내의 발언을 토씨 하나 놓칠세라 받아적었다. 개인 비위 혐의로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으로부터 대출 보증 압력을 받았다”고 의혹을 제기했던 신용보증기금 영동지점장 이운영씨였다. 그는 마지막 기자회견이었던 이날의 이벤트를 마친 뒤 검찰에 자진 출석해 구속됐다. 처음 피부에 와 닿은 폭로 현장은 공기마저 무거웠다.

권력형 비리 의혹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는 몇 가지 경로가 있지만, 파괴력 측면에서 폭로에 필적할 만한 건 없다. 상당수 폭로자가 내용을 잘 아는 공범, 내부자 또는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2002년에는 의무부사관 출신의 김대업씨가 나라를 뒤흔들었다. 그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아들 관련 병역비리의혹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직접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다음 대선은 김경준씨의 독무대였다. ‘BBK’의 ‘이음동의어’로 통했던 그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주가조작, 횡령 등 의혹을 폭로해 파란을 일으켰다. 2011년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인멸 사실을 폭로했던 장진수씨, 2016년 최서원(최순실)씨 관련 의혹들을 알렸던 고영태씨도 대표적인 폭로자들이다.

폭로의 품질과 결과는 균일하지 않다. 김대업, 고영태씨의 폭로는 시대를 바꿨다. 하지만 이운영씨를 비롯한 상당수 폭로자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주장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도 받아야 했다. 물론 이들에게는 공통점도 있다. 단물이 빠지면 예외 없이 폭로 이용 세력들의 외면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이 선배들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일단 가공(可恐)할 폭로 내용과 그 못지않은 폭로 가공(加工) 능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가 성공한 폭로자로 기록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지휘권을 빼앗긴 윤석열 검찰총장이 후배 검사들에게 단죄를 요구했던 ‘펀드 사기 비호 세력’의 앞날과 함께 말이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