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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위해 목숨 건 왕·대통령 못봤다” 연휴 달군 나훈아 콘서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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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올 추석 연휴를 뒤흔든 ‘나훈아 신드롬’에 대해 전문가들은 15년만에 방송 무대에 복귀한 나훈아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 트로트의 인기, 권위를 잃지 않은 ‘어른’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사진 KBS]

올 추석 연휴를 뒤흔든 ‘나훈아 신드롬’에 대해 전문가들은 15년만에 방송 무대에 복귀한 나훈아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 트로트의 인기, 권위를 잃지 않은 ‘어른’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사진 KBS]

한가위 연휴를 지배한 것은 코로나가 아닌 ‘나훈아’였다.

KBS 한가위 특집 ‘가황의 무대’ #73세 무색, 30여곡 열창 비대면 공연 #시청률 29%, 긴급 재편성도 19% #닷새 내내 화제는 ‘테스형 신드롬’

추석 전야(前夜)인 지난달 30일 밤 KBS2TV에서 방영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의 여운과 열기는 연휴 내내 이어졌다. 전국 시청률 29.0%(닐슨코리아 조사 결과)라는 근래 보기 드문 기록은 물론,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마다 “눈물이 난다” “왜 가황(歌皇)이라 부르는 줄 알겠다” “진정한 예인(藝人)을 봤다” 등 찬사가 넘쳤다. 또 “역사책 봐도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위해 목숨을 거는 거 못 봤다” “KBS는 국민의 소리를 듣고 같은 소리를 내는 정말 국민을 위한 방송이 됐으면 좋겠다” 등 뼈가 담긴 그의 발언은 어록처럼 온라인을 휩쓸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우리 마음을 속 시원하게 대변해줬다”(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 “정쟁의 도구로 전락시킨 아전인수식 해석”(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 등 정치권 설전의 소재로도 올랐다. 그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소환해 만든 곡 ‘테스형’도 연휴 기간 신드롬급으로 회자됐다.

지난달 30일 방송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의 한 장면. 전국 시청률 29%를 기록했다. [사진 KBS]

지난달 30일 방송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의 한 장면. 전국 시청률 29%를 기록했다. [사진 KBS]

결국 “재방송은 없다”고 공언했던 KBS는 3일 사실상 재방송 격인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스페셜-15년 만의 외출’을 급하게 편성했고, 이 역시 시청률 18.7%를 기록했다. 이날 방송에서 이훈희 KBS 제작2본부장과 나눈 대화도 울림을 줬다. 나훈아는 ‘어떤 가수로 남고 싶냐’는 이 본부장의 질문에 “우리는 유행가 가수다. ‘잡초’를 부른 가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부른 가수, 흘러가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 (유행가 가수가) 뭐로 남는다는 거 자체가 웃기는 얘기”라고 못 박아 답했다.

대한민국이 닷새간의 연휴 동안 이렇게 나훈아에 푹 빠지게 된 이유는 뭘까.

①15년만의 외출과 신비감=이번 공연은 나훈아가 15년만에 선 방송무대였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나훈아는 강력한 팬덤을 가진 가수로, 어쩌다 한 번씩 대형 콘서트를 하면 순식간에 매진되기로 유명했다”며 “평소였어도 시청률이 10%는 나왔을 텐데, 15년 만에 맘먹고 대형 무대를 펼친다고 하니 화제가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도 “30일 밤이 되니 SNS마다 ‘나훈아가 나온다더라’며 난리가 나더라. 그가 쌓은 실력과 명성 아니면 불가능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3일 서울 KBS홀에서 진행된 공연은 배·기차·용·불 등이 총동원된 압도적 스케일의 무대였다. 73세의 나훈아는 “서로 눈도 좀 쳐다보고, ‘오랜만입니다’라고 손도 잡아야 하는데, 눈빛도 잘 보이지도 않고 어쩌면 좋겠노”라며 비대면 공연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면서도 한복부터 민소매 티셔츠, 찢어진 청바지 차림으로 30여 곡을 열창하며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지난달 30일 방송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의 한 장면. 전국 시청률 29%를 기록했다. [사진 KBS]

지난달 30일 방송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의 한 장면. 전국 시청률 29%를 기록했다. [사진 KBS]

②트로트 열풍과 진짜 가수=최근의 트로트 열풍과 맞물렸다는 평도 있다. 김일겸 대중문화마케터는 “사회 전반 트로트 인기의 영향도 있었다. 젊은 세대까지 사로잡은 이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만 최근 등장한 트로트 가수들은 아직 덜 숙성되고, 연예인에 가깝다 보니 다소 식상했다면 나훈아는 그야말로 ‘가수는 이것이다’라고 보여주면서 신선한 자극과 충격을 줬다”고 덧붙였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트로트는 가사가 차지하는 서사가 매우 중요하다”며 “아이돌이나 젊은 가수들이 절절한 정서를 읊는다는 건 한계가 있다. 나훈아라는 70대 가수의 입으로 전달돼 이러한 폭발적 반응을 끌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 예능PD는 “역설적으로 ‘늙음’과 ‘나이’로 과시하는 게 아니라 실력으로 사회를 압도하는 거장이 그만큼 적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③‘어른’에 대한 그리움=곽금주 교수는 나훈아 돌풍의 이유로 ‘어른’과 ‘권위’도 꼽았다. 곽 교수는 “나훈아가 화제가 된 것은 소신 발언을 했다는 점”이라면서 “그런데 이 분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이미지가 있어 여야 지지층에서 그의 발언을 네거티브로 받아치지 못했다”고 짚었다. 곽 교수는 “사회가 양극화되면서 갈등이 첨예해지니까 모두가 자기만 옳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과거 김수환 전 추기경처럼 모두가 존경하고 말씀을 귀 기울일만한 어른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강해지고 있는데, 나훈아라는 존재가 그 지점을 파고들었다”고 말했다.

김일겸 대중문화마케터는 “작정을 하고 준비한 발언을 갖고 나왔다. 마치 ‘내 공연을 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며 “관객들에게도 그의 진심이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④TV는 또 보여줄 수 있을까=나훈아의 공연이 남긴 가능성과 과제도 만만치 않다. 공연 후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선 “오랜만에 수신료가 아깝지 않았다”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유튜브나 넷플릭스 등에 빼앗긴 시청자를 어떻게 되찾아올지 대안을 보여준 공연”이라며 “재방송을 하지 않은 승부수도 먹혔다”고 말했다. 다만 김일겸 대중문화마케터는 “이번엔 나훈아가 출연료를 받지 않아 제작비를 아꼈을 텐데, 계속 이런 볼거리, 대형쇼를 제공해야 TV를 본다고 한다면 방송국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보편성 측면에서 TV, 특히 지상파의 위력이 여전함을 확인했지만, 어떤 콘텐트를 담아야 할지는 고민을 계속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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