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친구로 삼아 달래야 돼요"

중앙일보

입력

직경 14㎝의 간암을 수술한 뒤 2개월 만에 폐로 전이된 경우라면 생존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의사들은 길어야 6개월로 예상한다.

간암은 모든 암 중에서도 가장 치료가 어려운 암인데다 발견 당시 크기가 너무 컸고 수술후 폐까지 전이된 말 그대로 말기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있고 컴퓨터단층촬영(CT)검사에서 암의 재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믿을 수 있을까.

1997년 간암 진단을 받은 전 서울대병원장 한만청(67.사진)박사가 최근 펴낸 자신의 암 투병기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돼라'(중앙M&B 간)가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누구도 믿지 않았던 기적이 일어난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韓박사를 만나 암투병 원칙들을 들어봤다.

"암환자에겐 무책이 상책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최선이지요." 韓박사는 의사의 치료 외에 일절 민간요법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자신의 암발병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의 지인이 녹용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먹지 않았다. 가족과 친지들이 몸에 좋다는 갖가지 비방들을 제시했지만 모두 거부했다. 비타민제는 물론 평소 먹던 홍삼마저 끊었다.

그래서일까. 폐로 전이된 후 실시한 5개월 간의 항암치료가 기적적으로 효과를 발휘했다.

그를 치료한 서울대병원 김노경 박사조차 항암치료가 성공할 확률을 5% 미만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암덩어리가 사라지는 관해(寬解)가 아니라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발하지 않은 사실상의 완치(完治)상태다.

그는 자신의 기적을 "이것 저것 함부로 먹지 않아서인지 몸에 약제에 대한 내성이 생기지 않아 항암제 효과가 최대로 발휘됐기 때문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그의 사례가 입소문으로 알려지면서 비결을 묻는 문의도 쇄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비방은 없다.

자신의 항암치료는 국내 의료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항암제인 시스플라티눔과 5FU의 조합이었을 뿐이란 것. 외국병원에 갈 것을 권유하는 주변의 제의도 뿌리쳤다.

그는 "간암은 미국보다 한국에 흔해 간암수술과 항암치료는 경험이 많은 국내 의료진에 받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말했다.

수술과 항암치료 동안 체중이 20㎏이나 빠지는 등 생사의 고비를 넘긴 그가 암환자와 가족들에게 권하는 메시지는 암 친구론으로 요약된다.

그는 "암을 친구 삼아 지내다가 조용히 돌려 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분노와 적개심으로 암과 싸우다 보면 평정심을 잃고 이것이 오히려 면역력을 떨어뜨려 암의 극복을 방해한다는 논리다.

韓박사는 "어차피 한번에 뿌리뽑을 수 없는 질환이라면 평생 약물로 다스려가며 치료하는 당뇨나 고혈압처럼 암도 수그러들 때까지 달래가며 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비록 암세포가 몸 안에 있어도 건강하게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논리다.

그러나 자만심은 경계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잔류 암세포가 다시 고개를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이 완치됐다는 표현에 신중하다. 韓박사는 3개월마다 CT검사를 통해 암 재발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솔직히 조마조마하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3개월마다 생명의 연장을 확인하는 삶에서 하루의 소중함을 절감한다고 밝혔다. 암에 걸리기 전엔 느껴보지 못한 삶에 대한 고마움이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