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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설영의 일본 속으로

'오토코 사회'가 만든 유리천장...멀고 험한 여성 총리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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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넌 장식품이야. 생각 따위 하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나 해”

자민당 총재 선거 여성 후보 0명 #여성 의원 9.9%, 세계 꼴찌 수준 #남성 위주 공천, 요직은 '연공서열'

일본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2’에서 여성 정치인인 시라이 아키코에게 노회한 정치인은 이렇게 쏘아붙인다. 시라이는 아나운서 출신의 국회의원이다.

국토교통상을 맡아 내각의 꽃으로 주목받지만, 정권의 간판 정책을 성공시키지 못하는 인물로 나온다. 드라마에서조차 일본의 여성 정치인은 외모나 간판으로 평가받는 무능한 존재로 묘사된다.

14일 치러지는 일본 자민당 총재선거엔 남자 정치인만 3명이 출마했다. 총리의 꿈을 품은 여성 정치인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번번이 현실적인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자민당 65년 역사 가운데 총재선거에서 여성 후보가 출마했던 건 2008년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현 도쿄도지사 단 한 명뿐이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2017년 9월 희망의 당 창당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고이케 지사는 일본 자민당 65년 역사상 총재선거에 출마한 유일한 여성 정치인이다. [지지통신]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2017년 9월 희망의 당 창당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고이케 지사는 일본 자민당 65년 역사상 총재선거에 출마한 유일한 여성 정치인이다. [지지통신]

이나다 도모미(稲田朋美) 전 방위상은 아베 총리가 전격 사임을 발표한 다음 날인 지난달 29일 “찬스가 있다면 도전하겠다”며 당 총재선거 출마 의사를 밝혔다. 그는 아베 정권에서 규제개혁담당상, 방위상, 자민당 정조회장, 간사장 대리 등 줄줄이 중책을 맡으면서 커리어를 쌓아왔다. 최근엔 ‘여성의원 비약의 모임’의 리더를 맡으며 첫 여성 총리로서의 의욕을 드러내 왔다.

2016년 8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함께 자위대 의장대 사열을 받고 있는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전 방위상. [로이터=연합뉴스]

2016년 8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함께 자위대 의장대 사열을 받고 있는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전 방위상. [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당내 파벌들의 이합집산으로 총재 선출 일정이 속전속결로 진행되면서 그의 뜻을 펼칠 기회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이나다는 이틀 뒤인 31일 아베 총리를 찾아 “이번에 출마하고 싶다”며 지원을 요청했으나 아베는 “이번엔 급하니까 어쩔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또다른 여성 총리 후보자인 노다 세이코(野田聖子) 전 총무상 역시 이번 총재 선거에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그는 2015년, 2018년 총재 선거에서도 출마 의사를 밝혔지만, 출마에 필요한 추천인 20명을 모으지 못해 뜻을 접어야 했다.

노다는 “이번 총재 선거는 몇몇 파벌의 힘에 좌우되는 선거”라고 불출마 이유를 밝혔다. 그는 파벌에 소속되지 않은 무파벌 정치인이다.

2017년 8월 새 내각 출범식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노다 세이코 총무상(맨 왼쪽). 오른쪽부터 모테기 도시미쓰 방위상, 고노 다로 외무상, 아베 신조 총리, 아소 다로 경제부총리. [EPA=연합뉴스]

2017년 8월 새 내각 출범식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노다 세이코 총무상(맨 왼쪽). 오른쪽부터 모테기 도시미쓰 방위상, 고노 다로 외무상, 아베 신조 총리, 아소 다로 경제부총리. [EPA=연합뉴스]

노다는 최근 AERA 인터뷰에서 “나 개인이 낙선하거나 추천인을 모으지 못해 창피를 당하는 건 전혀 상관없지만, 응원해준 다른 의원들의 명예에 상처를 입거나 새 총리 아래에서 페널티를 받게 할 순 없다”며 파벌 구조에서 '단독 플레이'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국제의회연맹(IPU)에 따르면 일본의 여성의원 비율은 9.9%로, 세계 191개국 가운데 165위다. 프랑스 39.7%, 이탈리아 35.7%, 미국 23.5% 등과 비교하면 한참 뒤처진 수치다. G7(주요 7개국) 가운데 100위권 밖에 있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2020년까지 여성의원을 30%까지 늘리겠다고 한 아베 정권의 약속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이처럼 일본에서 여성 정치인의 참여가 월등히 낮은 이유에 대해 우치야마 유(内山融)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교수는 “여성 정치인에 대해 사회적 저항감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를 키우고 집안을 돌보는 게 여자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여전해서 여성이 정치인이 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유권자들도 여성 정치인을 못 미더워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여성 없는 민주주의’를 쓴 마에다 겐이치로(前田健一郎) 도쿄대 정치학과 준교수는 “여성 후보자가 여성스럽게 행동하면 정치적 능력이 없다고 하고, 정치가로서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하면 여자답지 못하다고 비판을 받는 경향이 있다”는 유권자들의 이중성을 꼬집었다.

하지만 일본 정계의 구조적인 문제도 크다. 나가타초(永田町ㆍ일본 정치 중심지)는 대표적인 남성 중심의 ‘오토코(男ㆍおとこ) 사회’다. 특히 자민당은 파벌 중심으로 의사 결정이 이뤄지는데, 여기서 여성 정치인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는 쉽지 않다.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 조건인 ‘추천인 20명’이 여성 총리 탄생의 가장 큰 장벽으로 꼽히는 이유다.

정치저널리스트 후지모토 준이치(藤本順一)는 10일 도쿄신문에 “나가타초에선 정치는 남자가 하는 일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유감스럽게도 여성의원은 아직도 ‘장식품’, ‘표를 위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에다 교수도 "정당 조직의 낡은 메커니즘이 여성 정치인의 성장을 막는 '유리 천장'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민당은 중요한 당직이나 정부 요직에 진출하려면 당선 횟수를 많이 쌓아야 하는 ‘연공서열’ 방식이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 같은 구조는 젊을 때부터 의원 생활을 시작하는 세습 정치인에게 유리하다. 세습의 기회마저 적은 여성 정치인에겐 출발선부터가 다른 셈이다. 실제 2017년 당선된 중의원 가운데 당선 횟수가 10번 이상인 여성의원은 단 한 명도 없다.

정당이 선거에서 여성 후보를 내는 비율 자체도 적다. 2017년 중의원 선거에 출마한 남자 후보는 1180명인데 비해 여자는 209명으로 17.7%에 불과했다. 실제 당선자의 비율은 9.9%로 크게 낮아지는데, 이는 일본공산당 등 주로 야당이 여성 후보를 많이 냈기 때문이다. 자민당으로 범위를 좁히면 현역 여성 의원의 비율은 7.4%로 더 떨어진다.

여기엔 폐쇄적인 후보 공천 방식이 작용한다. 변호사, 기업인, 교수 등 다양한 자원 중에서 후보를 찾기보다 의원 비서, 지방 의원, 관료, 노동조합 간부 등에서만 후보를 찾다 보니 여성에게 기회가 적다. 여성 후보자는 주로 메달리스트 출신의 운동선수나 아나운서, 탤런트 같은 지명도가 있는 사람 중에서 발탁되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마에다 교수는 “정치가들에게 효율적인 정당조직은 주로 남성 정치가에게 효율적인 것이고, 여성에겐 남성처럼 편익이 배분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민당에서는 2030년까지 여성 국회의원을 30%까지 늘리기 위해선 여성 후보자를 일정 비율 할당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견고한 ‘오토코 사회’인 자민당에선 말뿐인 논의에 그치고 있다.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간사장은 “남녀평등은 존중해야 한다”면서도 “민주주의에선 선거민(유권자)의 의사로 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도쿄=윤설영 특파원 snow0@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