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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보다 무서운 코로나…선진국 나랏빚 2차대전 이후 최고치

중앙일보

입력

바이러스는 전쟁보다 무서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 선진국 정부 부채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로 늘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를 막으려 각국 정부가 곳간 문을 활짝 연 영향이다.

선진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선진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3일(현지시간)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를 인용해 지난 7월 기준 선진국 부채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 대비 128%로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2차대전 직후인 1946년(124%) 이후 최대 수준이다.

전 세계 GDP 대비 128%로 늘어나 #1946년 124% 이후 가장 높은 수준 #저성장ㆍ저물가로 비율 하락 난항 #저금리로 빚 부담 낮출 수밖에 없어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을 역임한 글렌 허버드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명예 학장은 WSJ과의 인터뷰에서 “상대는 외세가 아닌 바이러스지만, 우리는 전쟁 중”이라며 “바이러스를 통제하기 위한 싸움을 치르는 상황에서 지출 수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각국 정부는 경제활동 중단(셧다운)을 택했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실업률은 높아졌다. 소비와 생산이 위축됐다. 경기가 고꾸라지며 각국 경제는 뒷걸음질 중이다. 미국의 2분기 성장률(-32.9%, 전기대비 연율)은 73년 만에 가장 낮았다. IMF에 따르면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은 -4.9%로 예상된다. 선진국은 8% 역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의 추락을 마냥 보고 있을 정부는 없다. 경제 활동 중단에 따른 소득 감소와 소비 위축 등으로 인한 신용과 유동성 위기가 금융과 경제 전반의 위기로 확산할 수 있어서다. 실업급여와 재난소득, 감세 등의 수단을 동원해 재정을 풀었다. 지난 6월 발표한 IMF의 ‘재정분석보고서’에서 따르면 올해 각국이 경기 부양을 위해 11조달러(약 1경3200조원)를 투입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쏟아부은 돈은 고스란히 나랏빚으로 돌아오고 있다. IMF에 따르면 올해 들어 GDP 대비 정부부채는 지난해와 비교해 나라별로 20~40%포인트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미국의 경우 지난해 108.7%이던 비율이 올해 141.4%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전국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조치가 확대 시행되고 있는 가운데 24일 대전 서구보건소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들이 시민들을 상대로 코로나 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전국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조치가 확대 시행되고 있는 가운데 24일 대전 서구보건소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들이 시민들을 상대로 코로나 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빚이 늘어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의 상황을 보면 그렇다. 전쟁이 끝난 뒤 군사비 지출이 줄고 급속한 경제 성장이 이어지며 정부 부채 비율이 빠르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GDP 대비 부채비율은 59년 50% 이하로 떨어졌다.

문제는 코로나19 이후에는 이런 낙관적인 시나리오를 기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WSJ은 “코로나19를 퇴치해도 2차 대전 이후의 호황은 재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선진국의 성장 동력이 떨어진 데다 인구 증가세 둔화와 고령화 등이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어서다. 경기 개선에 따른 수요 증가 등에 수반된 인플레이션 효과도 누리기 어려울 전망이다. 물가가 오르면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부채 부담이 상대적으로 완화되지만 최근과 같은 저물가 기조 속에서는 언감생심이다.

그나마 각국이 기댈 구석은 저금리다. 돈의 값(이자)이 낮으면 빚 부담이 완화되기 때문이다. 이승훈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지난 4월 보고서에서 “물가 상승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부채 비율을 충격 없이안정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질 금리를 장기간 낮게 유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각국 중앙은행은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움직이며 저금리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WSJ은 “(중앙은행이) 금리 정상화를 도모하더라도 이전 수준을 밑돌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오히려 전례없이 늘어난 정부 부채가 ‘뉴노멀’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늘어난 나랏빚의 주요 채권자가 각국 중앙은행이라서다. 각국 중앙은행은 장기 금리를 낮추고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막대한 양의 국채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 26조 달러 중 4조 달러는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보유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빚 11조 달러 중 일본은행에 빚진 것이 4조 달러가 넘는다.

국가채무 변화.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국가채무 변화.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한국의 상황은 선진국보다 나을 게 없다. 기획재정부가 예상한 올해 한국의 국가채무 비율은 GDP 대비 43.5%다. 본예산에 3차례에 이른 추가경정예산(추경)까지 반영한 수치다. 주요 선진국보다 양호하지만 숨은 함정이 있다. 선진국은 재정 투자 확대의 역사가 긴 데다 미국ㆍ일본처럼 기축통화국인 경우 부채 비율에 크게 개의치 않고 ‘헬리콥터 머니’를 뿌릴 수 있어서다.

더 큰 문제는 빚이 늘어나는 속도다. 2001년 17.2% 수준이던 국가채무 비율은 10년 만인 2011년 30.3%로, 9년 만인 올해에는 40%선을 뛰어넘었다. 재정위기를 겪은 곳을 제외하고 이처럼 빠른 속도로 부채 비율이 상승한 국가를 찾기 힘들다. 여기에 정치권이 만지작거리는 2차 재난지원금과 4차 추경 논의도 나랏빚 증가세를 가속화할 수 있다.

이영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코로나19 같은 외생적 경제위기 하에선 재정을 확장적으로 써서 위기를 극복할 수밖에 없지만 저소득층이나 자영업자 등 피해가 크거나 의료ㆍ보건 등 중요한 부분을 선별적으로 지원해야 효과도 있고, 위기 이후 경제 회복 속도도 빠르게 할 수 있다”며 “현재 정치권 논의는 ‘표 계산’에만 집중하다 보니 정반대로 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하현옥ㆍ조현숙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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